내 모든 여행의 순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단 한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인도에서 한 남성과 나눈 대화를 고를 것이다.
지금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 한 석굴사원 앞이었다 (일기장과 사진첩을 들춰보니 아잔타 석굴이었다). 인도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시점, 나와 내 동무는 어딜 가나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우리를 보는 인도인들의 시선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냥 쳐다보고 수근덕대기만 하면 다행이고, 어디에서나 노골적으로 우리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높이 들어 우리를 프레임 안에 넣어 찍는 이는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우리를 신기한 배경 삼아 다짜고자 자녀를 우리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그날 그 석굴사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는 그래도 퍽 예의 바른 사내였다. 우리에게 와서 "같이 사진 찍어도 돼?'라고 묻는다.
그래, 너 잘 걸렸다.
공손하게 물어본 대가로 그는 우리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아야 했다.
"우리 여행 중인데, 너처럼 우리한테 와서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Becuase we want to share this moment with you."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큰 눈을 둥글둥글 굴리며, 동시에 싱긋 웃으며 그가 답했다.
댕-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낭만적인 대답을 한다고?!
이탈리아에 온 줄 알았네. 잔뜩 성 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능글맞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니 어쩌랴, 함께 사진을 찍을 수밖에.
실제로 그의 생각은 뭐였을까. 그저 얼굴이 하얀 동양 여자 둘이 인도 바지를 입고 돌아가니는 게 신기해서, 혹는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럴듯한 거짓 이야기를 덧붙여 떠벌리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멋드러지게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오로지 그 사내만 알겠지만, 그 순간 그의 저 대답은 그동안 은근히 쌓여온 불쾌감을 모두 없애버리기에 충분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이 순간을, 누군지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인과 함께 나누고 싶다니.
맞아, 나도 그러려고 이 미지의 땅에 와 있는 거잖아.
그가 후에 우리와 찍은 사진을 두고 어떤 무용담을 지어냈든, 아니면 설령 다음 날 바로 잊어버리고 이게 뭐야? 하며 삭제해버렸든 간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그 순간을 함께 나눴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법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꽤나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일 중에 유독 저 대화가 아직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그 큰 눈을 가진 인도인에게서 가장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고 그래서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 별 거 아닌 문장이 마음에 남아 곱씹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제아무리 많이 윤회를 거듭해 수없이 많은 생을 산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 찰나이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설사 일면식도 없는 남이라 한들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