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또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생산적인 하루를 보냈다. 몸도 안 좋았었고 작게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다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나니까 비로소 아, 미루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 기간 동안 대학원에 와선 못 읽던 종류의 책도 읽었고 새 취미도 익혔으니 나름대로 소득이 있었다.
대학원에 와서는 내 앞에 떨어진 글을 씹어삼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그걸 가짜독서라고 부른다. 어릴 적에 독서를 좋아했기에 그 읽기를 독서라고 부르기 싫은 데다 이 독서는 일이기에 가짜독서라고 한다. 취미로 책을 읽을 때에는 심적인 부담도 적고, 하나의 책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가볍게 빗대어보면서 읽는다. 취미 독서에는 오독의 압박이나 무지의 부끄러움이 없다. 어려운 책이라도 그 책이 다른 책과 맺는 관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면 진짜 독서로 분류한다.
가짜 독서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 독서와는 종류가 다르다. 가짜 독서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아하던 취미도 일이 되면 다르게 다가온다. 독서도 그렇다. 대학원에서 하는 가짜 독서는 시작하는 연구자로 내실을 쌓기 위한 독서이다. 직업 독서, 일하는 독서라고 할까. 읽는 책들은 소위 말하는 전공도서인데, 전문 분야에 진입하여 작은 분야를 더 꼼꼼하게 알고자 하기 때문에 읽는다. 전공도서는 책과 책이 연결되면서 글자가 의미할 수 있는 바를 촘촘하게 만들고, 촘촘해진 의미를 이용해서 분석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말한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평균적인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상식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기에 가짜독서는 아무래도 자기폐쇄적인 경향이 있다. 바로 그 촘촘한 벽이 전문 분야를 전문 분야로 만들기 때문에 공부를 안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일단 나의 생활 방식은 공간적으로 엄청 쪼그라든다. 책상 생활하는 직장인들은 보통 생활 반경이 직장이라는 장소로 쪼그라들긴 하는데 연구자는 좀 극단적으로 몸을 안 써도 되는 직업이다 보니 불리기 전의 노란 콩처럼 근육도 쪼그라들고 생활 반경도 쪼그라든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건축 연구자들이라는 상상된 공동체에 나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자르고 잘라내서 촘촘해지고 어쩌면 쪼잔해진 관점이 전 세계에 있는 다른 연구자들과 나를 연결시킨다면서. 어쩌면 그 부분이 지식 생산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가짜 독서로 읽게 된 상당한 책은 나와 사적으로는 전혀 상관 없는 외국인들이 쓴 것이고 그들을 학자로서 존경하지만 공부가 아니라면 그 영감들과 만날 일도 없고 썩 사석에서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 학자들이 쓴 글을, 그 글을 쓴 인간 말고 쓴 글을 알게 되었기에 다른 글들, 그리고 그 글을 읽고 있을 한 꼬집 정도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깊은 숲속 우물 안의 개구리의 배꼽 위에 털 하나 가지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한다. 글은 영화처럼 같이 읽을 수가 없으니까 보통 혼자서 그러다가 다 읽고 나서 동료들에게 좋았니 싫었니 한다.
최근 근대 건축 운동에 대한 비평을 같이 읽었다. 나는 그 글이 진짜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근대 건축을 깊이 알면서 창의적으로 논지를 전개한 글이라고 제 혼자 들떠선 다들 재밌게 읽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스터디 자리에선 무언가 난해하다는 반응이라서 잠시간 외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