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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가연 Oct 15. 2023

벽돌이 아치가 되고 싶다잖아

하고 싶다는데 그냥 하게 해줘라...

편직물을 만드는 취미가 있다. 최근에는 책갈피 만들기에 꽂혀가지곤 한 뼘이 안 되는 길이의 무언가를 계속 짜고 있다. 편직물을 만들다 보면 각 실마다 원하는 방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정말로 모든 물질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행동이 있다. 예를 들면 세게 꼬인 태팅실은 태팅하기가 편하다. 꼬임이 잘 넘어오니까. 그러나 덜 꼬인 실과 만났을 때에 태팅실에 응축된 에너지가 다른 실로 옮겨와서 다 꼬여버린다. 실로 코바늘뜨기를 할 때에는 실이 중간에 꼬이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한다. 말하자면 실을 살살 달래가며 걔의 성격을 잘 파악한 다음, 실의 의지와 내 의지가 적당히 만나는 곳에서 멈춰야 예쁜 편물이 나온다.  대신 탄탄하고 면사인데도 은근한 광택이 있어 정말로 아름답다.


실과 소통하는 과정이 건축과 비슷하기도 하다. 실이 되고 싶어하는 성질을 파악하고, 그 성질에 맞는 도안을 찾고 있자면 어딘가에서 들은 루이스 칸이 벽돌에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출처는 모르겠다.) 인장력은 못 받고 압축력은 잘 받는 벽돌은 아치가 되고 싶었다더라, 대충 그런 썰이었다. 정말 물론 그 벽돌이 아치가 되려면 설계 의도 상 아치가 필요한 공간이라고 건축사무소에서 결정 후 클라이언트 미팅, 구조계산, 예산검토 등등을 죽죽 거쳐야 하기에 요즈음의 벽돌들은 보통 아치가 못 되고 외장재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편직물은 혼자 골방에서 즐기는 취미일 뿐이니까 실에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 뒤에 걔 말을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약간 보송하고 꼬임이 덜 들어간 흰색 실이 도일리가 되고 싶다면 도일리로 만들어주면 된다.

스크린 과잉의 시대,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신체나 공간의 비물질화에 대한 담론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나는 오히려 물질에 예민해지고 있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계속 이미지에 관심을 가져 왔다. 먼저 건축가는 건물을 스스로 짓지 않고 이미지를 잘 만들어서 자기의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건축 이론과 실무 측면 모두에서 이미지는 주요한 매체였다. 게다가 사진, 도면 등 건축 이미지를 엄청 많이 보면서 한 개인은 건축계의 일원이 된다. 전 세계에 지어진 주요한 건축물을 한 사람이 다 볼 수는 없고,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설계안도 건축의 주요한 부분일 때가 많다. 지어진 건물만을 건축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건축은 건축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아무튼 2010년 정도부터 sns가 발전하면서 이미지를 접하기가 너무나 쉬워졌고, 3D 오브젝트의 렌더에 시간이 거의 안 걸리는 리얼 타임 엔진들이 나오고,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인공지능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그렇게 축적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이미지들이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스의 꿈은 꽤 오랜 기간 포토리얼리즘을 향하고 있었고, 건축도 사진이 등장하자마자 사진적 이미지들과 함께해왔기에 인공지능으로 그럴듯한 건축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내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인공지능으로 만든 오만 이미지들 중에 건축적인 것들도 있다. 건축을 담은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품질에 상관 없이 정말 많이, 정말 오래 보는 걸 꽤나 긴 시간동안 해 왔지만 2020년 이전에 걔네들은 건물 사진일 거라고 의심치 않았는데 요새는 알고리즘이 문제인지 뭐가 문제인지 인공지능이 만든 이미지들이 계속 뜬다.

요새 인공지능이나 3D를 렌더해서 만든 이미지들을 계속 마주하면서 되려 나는 물질에 더 예민해지고 있다. 일단 인공지능이 만든 이미지에는 뭔가 구축적이지 않고 미끌거리는 특유의 물성이 있다. 대강 만든 컴퓨터 그래픽스는 대상의 표면이 지나치게 미끈하고 대상의 윤곽은 날카로운 편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에 계속 노출되면서 다시 지어진 공간의 논리에 예민해진다. 만들어진 공간을 렌즈로 촬영하여 재구성한 이미지에만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과 닮아 있지만 다른 곳에서 유래해서 귀신과 같아진 이미지들이 등장하면서 이미지를 느끼는 감각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가끔 정말로 헷갈리는 건축적 이미지들이 있어서 째려봐야 할 때가 있어서 나랑 같이 살아가는 물질들이 어떤 논리를 가지고 붙어있는지 상기해서 그런다?


아무튼 그렇게 렌즈 기반이 아닌 이미지들이 가진 그럴듯함 속의 어색함이 물질 세계를 향해서 반작용을 만드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물질이 가진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건물에 하자가 나고 기능을 못 한다. 그리고 그 물질들이 가진 논리들이 이어져서 건물을 만든다. 그 논리가 만든 공간에 살면거그것에 기반한 이미지들을 주로 보다가, 인공지능이 만든 흘러내리고 뭉개진 건물 이미지를 보게 되니까 번듯함이 더 번듯해 보이고 있다. 아니, 번듯하지 않아서 관심 없던 것까지 관심이 생긴다. 치덕치덕 실란트 발라서 대강 마무리해놓은, 평탄하지 않은 타일 같은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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