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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Nov 16. 2023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해석

너만의 탑을 쌓아 가거라!

  ... 아이에게 너는 저 포도라는 나쁜 대상을 황새의 뱃속에서 빼내고 싶어 할 것이며 네가 여우를 무서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친다. 나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화의 구조들로, 즉 공포증 속에서의 시니피앙처럼 훨씬 더 큰 동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역할을 하는... - 자크 라캉, 「에크리」, 새물결출판사, -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를 인용한 문장인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람한 이들이라면 오히려 뭔가가 짚이는 기분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들이 애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를 질문할 때 부모가 둘러대는 클리셰가 있는 것처럼, 서구에는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는 설화가 있단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건 왜가리이지만, 문화인류학적 스토리텔링에는 능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비슷한 상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가리가 인도한, 죽은 엄마가 여전히 살아있는 세계에서, 엄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다른 세계는 마히토의 탄생 이전 시점,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도 왜가리는 그런 상징인 듯 하다.  


   구멍만 있으면 엄마의 자궁으로 해석하려 드는 프로이트주의자들을 많이 비판해왔는데, 이번에는 그들의 해석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서재라고 해야 할까? 도서관이라고 해야 할까? 여튼 그 건물로 들어가 마주한 세계는 탄생 이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소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엄마와, 그 세계를 지키고 있는 큰 외증조부가 있다.

   그렇다면 펠리컨과 앵무새는 어떤 상징일까? 그의 여러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개인을 옭아매고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욕망과 타자의 담론이 아닐까? 


   난해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원고화를 해야 하는 입장에선 난감하기까지 하다. 그 와중에 비교적 선명히 다가오는 것은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은 후 처제(나츠코)와 재혼을 한다. 그러니까 마히토에게 이모가 새 엄마가 된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새 엄마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만, 또한 약간의 불편함이 있다. 그 불편함은 생각보다 더 큰 ‘증오’일 수 있다는 사실은, 꽤 비중 있는 역할인 하녀 키리코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마히토가 이모를 새 엄마로 인정한다는 것. 나츠코가 마히토에게 엄마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 그 현실을 감싸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서 두 사람이 이끌려 들어간 곳에 엄마와 언니가 있었다.


  화재로 세상을 떠난 엄마는, 저쪽 세계에서는 불의 마법을 사용하는 소녀다. 나는 나의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이니 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죽음에 대한 슬픈 위로 같기도 하면서, 마히토의 미안함이 투영된 판타지 같기도 하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히토의 엄마로 태어날 시간의 문을 여는 장면은, 그런 운명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너의 엄마로 태어날 터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이모를 엄마로 잘 모시고 살라는 당부가 아니었을까? 또한 내내 나츠코에게 보인 애정도, 너무 미안해하지 말고 마히토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달라는 당부는 아니었을까?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원작도 이런 구성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언제고 아이가 커서 이 책을 펼쳐보리라는 기대로 엄마가 적어 놓은 글귀가 있었다.

   2023년 10월 25일, 개봉 첫 날. 동네 영화관에서 조조로 보고 와서 이 에필로그를 쓰고 있다.  막 하야오에 관한 원고를 끝내고 본 영화이다 보니, 좀 더 유심히 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하야오는 도쿄 태생이지만미군의 공습이 잦아지면서 가족 모두가 도쿄에서 다소 떨어진 우쓰노미야라는 소도시에서 머물게 된다가족이 운영하는 공장의 원청업체와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그리고 군수산업으로 돈을 번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저택이 있었다하야오 작품이 대개 그렇지만, 유년 시절의 경험이 토대가 된다. ‘미안함’의 정서에 있어서도, 이 작품이 은퇴작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시간을 집대성한 느낌은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세계의 자기 오마주인 듯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특히나, 하야오가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추억의 마니」가 겹쳐지는 부분이 꽤 있다.     


   「추억의 마니」가 흥행이 어렵다고 본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나 홍보 방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 즉 세상이 근본적으로 전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판타지 세계를 그리고 그곳에서 현실 세계를 돌아본다는 수법, 이른바 우화적인 영화에 다들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제작을 잠시 쉬는 직접적인 이유는 미야의 은퇴이지만, 배경에는 그런 세상의 움직임이 자리한다. 

   「추억의 마니」는 현실 세계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만든 기획이었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에요.”라고 다정하게 안아줄 수 있다.   


   에필로그에 사용하려고 메모해 두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의 말을 이 작품과 관련해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저 때, 「추억의 마니」가 지브리 스튜디오 마지막 작품이란 이야기도 나돌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 하야오는 아직 건재하고 은퇴의 변을 다시 주워 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방법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해 건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큰 외증조부가 마히토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 그리고 하나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그런 상징은 아니었을까?

   “너만의 탑을 쌓아 가거라.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거라.”     

  

   이 대사를 중심에 놓고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을 음미해 보자면, 질문의 포커스를 마히토 개인에게로 좁힌 문장 같다. 


   하야오의 주제 중 하나가, 다수의 담론에서 벗어나 너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몰려들어 경쟁하듯 달려간 곳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망정, 행복은 없다잖아. 자신이 가야할 길,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그 유일한 세계의 입법자가 되는 일. 마히토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너’이자,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생각을 의미하는 것도, ‘전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닐 터. 이번 책에서 주로 인용한 라캉의 정신분석과 들뢰즈의 철학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되지 않는 삶은 없다. 개개인의 이야기는 다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그것이, 관습과 담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정말 당신이 주인공인 이야기인가를 하야오는 묻고 있다. 


- 민이언, <이해되지 않는 삶은 없다>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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