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에 따르면, 하야오가 프로듀서를 맡은 『귀를 기울이면』은 감독 콘도 요시후미의 작품으로 봐야할지 하야오의 작품으로 봐야할지가 모호하다고 한다. 그만큼 감독의 자격으로 참여한 작품이 아니었어도 그의 영향력은 컸던 경우경우까지를 함께 다루어 볼까 한다. ...
시험을 보다 말고 스기무라 쪽을 쳐다보는 시즈쿠.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는 스기무라에게 시즈쿠는 낮은 목소리로 대뜸 ‘바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단짝 친구인 요코의 마음을 몰라주는 스기무라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러니까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친구를 대신한 우정의 언어이다.
내막을 알 리 없는 스기무라 입장에서는 황당하다. 게다가 스기무라는 요코가 아닌 시즈쿠를 좋아하고 있다. 실상 마음을 몰라주는 ‘바보’는 시즈쿠 저 자신이기도 했다.
스기무라 입장에서는 그 ‘바보’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자의 육감으로 스기무라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시즈쿠가, 왜 자신을 좋아하면서 고백도 못하냐며, 용기 없는 남자를 향해 투정 어린 질책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날 스기무라는 시즈쿠에게 ‘바보’의 의미를 묻다가 얼떨결에 시즈쿠에게 고백을 한다. 바보가 바보에게….
‘앞으로도 그저 친구일 뿐이야?’라고 묻는 스기무라의 쓸쓸한 물음 이후 시즈쿠와는 한없이 어색한, 겨우겨우 친구인 상황이다. 얼마 후 스기무라는 세이지와 시즈쿠의 사이를 알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을 아껴두고 있었던 이 러브스토리에, 결국 자신은 조연에 불과했다는 깨달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스기무라가 갈망했던 방향으로는 쓰여지지 않고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유코의 존재가 별 다른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
언어는 맥락이다. 문제는 누구 입장에서의 맥락이냐는 것. 나의 이해로 다가선, 나를 둘러싼 맥락에서의 오해. 조금 더 다가와 달라는 시그널이었을까? 아니면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던 나의 해석이었을까? 최선의 경우를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나와 버린 그 고백으로 인해 불편함 혹은 부담의 거리로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하는 복잡한 심정.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실보다도, 이젠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내 진심이 더 불안이라서….
스기무라는 얼마나 후회했을까? 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가까워지지는 못하더라도 이전과 같은 애틋함의 거리라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을, 차라리 시즈쿠도 내게 마음이 있었을 거라는 여지의 오해로 남겨 둘 것을, 이젠 어색한 시선으로 시즈쿠의 일상을 바라봐야 한다. 시즈쿠도 나만큼이나 어색할까,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걸까, 하는 고민도 시즈쿠가 다른 남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것으로 끝이다. 차라리 시즈쿠가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면, 이렇게까지 초라해지지는 않을 텐데, 애써 아닌 척 괜찮은 척 해도, 전혀 괜찮지 않고 계속해서 신경이 쓰인다.
남는 것은, 그 사람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던 나의 오해와,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해. 물론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느냐 그 동안 다가서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한 방의 결정적 오해로 인해 용기를 내어 다가섰다가 이해로 멈춰선 자리에서의 어색함.
이 사랑을 저 사랑으로 잘도 잊어가는 경우가 있는 반면, 이 사랑을 잊을 때까지 다른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만을 바라보다가 더 좋은 인연일지도 모를 시선에는 무심하기도…. 그런데 또 어쩔 수 있나?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도 그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 그 놈’이기에….
고백의 말을 모질게도 잘 참아내고 있는 경우도 인연은 아닌지 모르지만, 혹 받아들여지지 않은 고백으로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인연인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앞서는, ‘사랑, 그 놈’이기에….
- 민이언, <이해되지 않는 삶은 없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