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입니다!
레비나스 철학에서 ‘얼굴’은, 그의 주요 개념인 ‘타자’의 세부 매뉴얼이다. 얼굴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에게 표정으로서 말을 건네는 언어이다.
풍경에도 인격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나? 들뢰즈는 풍경을 ‘얼굴’로 설명한다. 그 비인칭의 ‘격’이 말을 건네올 때가 있잖아.
화가 분들이 인물의 얼굴을 흐릴 땐, 원근의 이유도 있지만, 익명성의 타자를 표현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비인칭으로서의 얼굴은 특정 대상이 아닌 일반성을 포괄한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슬램덩크>의 ‘북산고’라는 공간은 그런 일반성의 시간이기도 하다. 누구나가 학교는 겪기 마련이니까. 추억의 대상으로서, 팬들의 기억을 대리하는 얼굴이다. 실상 학창시절에 대한 별 추억이 없는 이들에게도, 낭만의 기억으로 자리하는, 그들 각자의 모교를 대신하는 심상이기도 하다.
진중권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문적 시간을 구원하는 운문적 기억. ‘운문적’이라... 이 표현에 동의하던 그렇지 않던,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알겠지 않아? 그런 미적 동력 하나가 없다는 게, 이 권태로운 삶의 이유라는, 프루스트와 프로이트의 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