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림 Nov 18. 2021

마음에 쏙 드는 집

<춥고 더운 우리 집> 읽고 쓰기

어릴 때 우리 집은 춥고 어두웠다. 겨울이면 하얀 입김이 보였다. 밖에서 입는 겨울 점퍼를 집 안에서도 입었다. 남향인지 따지지 않고 중개인이 처음 보여주는 집을 단박에 계약해 버리는 아빠와, 아빠의 표현을 빌면 "남편 말에 토달지 않는" 엄마는 동향이나 서향 집에 살았다. 어릴 때 한 번 남향집에 산 적도 있지만 그때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벽은 물론 창까지 다 덮을 만큼 아빠 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가보고야 알았다. 낮에 전기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고 벽지가 보이며 소리가 울릴 만큼 널찍한 집도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집에는 벽마다 천장까지 책장이 빼곡했다. 책은 많지만 돈은 없었기에, 책장은 동네 철물점에서 맞춘 싸구려 '앵글'이었다. 책을 꺼내다 모서리에 손을 베기도 했다. 중학교 때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왜 네 방인데 아빠 책만 있어? 그것도 이렇게 흉한 책장에?"라며 놀랐다. 내 방이 부끄러워졌다. 그 후로는 아주 친한 친구 외엔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사방에 책이 있으니 살림살이 둘 곳이 부족했을 테고, 어둡고 먼지 많은 집을 쓸고 닦기도 지쳤을 것이다. 딱 한 번 엄마가 "나도 남들처럼 밝고 깨끗한 집에 살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남이랑 비교하지 말라고, 남들 부러워하지 말라고. 비교하지 말라는 말만 떼어놓고 보면 맞는 말 같지만 나는 아무래도 덮어놓고 책을 쌓아놓는 아빠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처음으로 나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설렘도 잠시, 월세 45만원짜리 원룸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 집도 추웠다. 평소에도 일하느라 10분 거리 집에 못 가고 밤 새울 때가 많았지만 겨울이면 일부러 따뜻한 편집실 소파에서 잤다. 나에게 집은 아주 가끔 씻고 빨래하고 잠만 자는 곳이었다. 신혼집도 마찬가지였다. 빨래를 돌려줄 남편이 생겼다는 게 유일한 다른 점이었다. 예산에 맞춰 얻은 전셋집은 쓰레기장이 내다 보이는 2층이었다. 블라인드를 365일 24시간 닫고 살았다. 곰팡이 때문인지 신혼집도 냄새가 퀴퀴했다.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집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행했던 시절에 살았던 집이다. 그 집으로 이사하던 날 아침 둘째를 임신 중이던 나는 매트리스까지 흠뻑 적실 만큼 많은 피를 쏟고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이사는 남편이 혼자 치렀고 첫째는 할머니 집에서 잤다. 일주일쯤 후에 피는 멎었지만 양수가 조금씩 새고 있으니 꼼짝 말고 누워만 있으라는 주의를 듣고 퇴원했다. 지은 지 2년밖에 안 된 34평 아파트는 대궐처럼 넓었다. 정남향은 아니지만 해가 잘 들었고, 저층이었지만 공원이 보여서 시야가 답답하지 않았다.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니 집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짐이 별로 없어서 이사 업체에서 놀랐다고 했는데 큰 집에 적은 짐을 놓으니 말소리가 울릴 만큼 빈 공간이 많았다. 어릴 때 그렇게 부러워했던 벽이 보이고, 환하고, 깨끗한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이 집에서라면 몇 달이든 꼼짝않고 누워서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와 한 몸으로 지냈지만 5분 이상 일어서 있으면 어김없이 다시 하혈을 했다. 둘째가 잘못될까 봐 많이 울었다. 넓고 비어있어서 소리가 울리는 집에서 첫째는 큰소리로 노래를 하고 꺄르르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자궁도 건강해졌다는 말을 들은 날 처음으로 첫째와 단지를 산책했다. 놀이터를 소개해주겠다며 아이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유아차를 끌기 좋은 평지에 있는, 주변에 공원과 도서관이 있는, 조용하고 안전한 새 아파트였다. 전에는 언덕에 살아서 킥보드도 못 타게 조심시켜야 했기에 평지에서 내달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행복해졌다.



몇 주 뒤 둘째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갑자기 내 삶은 불행해졌다. 소리가 울리는 집에서 매일 밤 남편과 소리 지르며 싸웠다. 가족들은 예고없이 찾아와서 울었다. 두 달 동안 누워만 있었더니 걷기조차 힘들어진 나는, 아이 낳기를 반대하는 가족들이 내가 잠든 사이에 불법중절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끌고 갈까 봐 무서워서 네 살 첫째의 손을 꼭 잡고 옆으로 누워 쪽잠을 잤다.(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전의 일이다.) 평생 울 울음을 그 집에서 다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 집이 좋았다. 그 집은 따뜻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고위험군 임신부가 두껍게 껴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따뜻하고 아늑했다. 양수과다증으로 쌍둥이를 임신한 것처럼 커진 배를 이고 아일랜드 식탁에서 저녁 준비를 하면 첫째가 거실에서 노는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거동이 불편해진 나는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다. 소파에 누워서 친구들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슬픔을 이야기하며 위로를 받았다. 친구들은 육아 용품, 아기 옷, 유축기 등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나를 떠나진 않았지만 통 같이 사는 것 같지 않게 사는 남편 대신 친구들이 내게 필요한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줬다.



한겨울 둘째를 낳고, 신생아 중환자실에 아이를 두고 홀로 퇴원해서 세 시간마다 초유를 유축할 때도, 롱패딩을 단단히 챙겨 입고 면회를 다녀올 때도, 따뜻하고 밝은 집이 위안이 되었다. 첫째 앞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인 척 남편과 연기를 할 때도 그 집의 아늑한 분위기 덕에 덜 어색했다. 퇴원한 둘째를 신생아용 카시트에 태워 종합병원을 사흘에 한 번 꼴로 다닐 때도 집으로 돌아와 수유 의자에 앉으면 잠시나마 평화를 느꼈다. 집에 인격이 있다면, 그 집은 너른 품으로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인격을 가졌다. 그 집 덕에 매일 울면서도 그 시절이 아주 끔찍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남편이 출근을 하거나 해외 근무를 할 때, 병원 일정이 없는 시간에는 나와 둘째만 집을 지켰다. 우리 둘만 집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아이를 장애아라고 부른다는 것도, 가족들조차 아이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사들이 늘어놓는 무서운 합병증도 다 잊을 수 있었다. 나와 둘째아이와 우리 집, 우리 셋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참 따뜻했다. 나를 위로해준 것처럼 집은 둘째를 환영해 줬다.



아쉽게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우리 집은 법적으로 우리 집이 아니었다. '집주인'이 들어와서 산다기에 사랑해마지 않는 집을 떠나야 했다. 옆 단지, 마음에 안 드는 집으로 급히 이사온 나는 자주 그 집 앞을 맴돈다. 집주인은 잘 살고 있을까 올려다 보고 공연히 단지를 한 바퀴 돌고 지금 사는 집으로 돌아온다. 둘째의 태몽은 그 집 거실에서 보이는 나무가 쑥쑥 커서 온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볼 정도로 아름다운 잎이 반짝이는 꿈이었다. 나는 그 집을 오래오래 그리워할 것 같다.





감응의 글쓰기과제로 <춥고 더운 우리 > 읽고 썼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나를 위한 자녀교육법 서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