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 엘리 Jan 22. 2020

당신도 차별주의자인가요?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김숙이 한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어디 남자가 밖에 나와? 집구석에서 조신하게 살림이나 하지."


 이후 그녀는 '숙크러쉬'라는 캐릭터를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누가 열광하고 지지했을까? 대한민국 여성들이었다.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인상을 써?", "집안에 남자 잘 들여야 한다더니." 같은 김숙의 말들은 그동안 여성들이 직, 간접적으로 들어야 했던 성차별적 표현을 꼬집은 것이니 말이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김숙 어록이라 불리는 말들은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본인의 일이 아니었기에 둔감했던 대한민국 남성들도 그녀의 말들이 가시화되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편견'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별한 적이 없는데?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 김지영>을 읽은 후 난, 내가 여아로, 여학생으로, 여대생으로, 여직원으로 살면서 겪은 차별과 편견들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잘 몰랐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나는 종종 부모님에게, 학교에서, 회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 여자애가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니?

- 여자애가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니 유별나다.

- 너는 여학생이니 부반장을 해라.

- 여자는 시집 잘 가면 장땡이다.

- 우리 회사는 여직원을 배려하는 회사입니다. (임원은 전부 남자였고, 같은 경력의 남직원의 승진이 빨랐다.)


 하지만 난 이런 말들, 상황을 '당연한'것이라 생각했다.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차별이 없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별은 공기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다 © 창비



 김지혜 작가는 자신의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이렇게 밝혔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 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당신은 차별이 보이나요? 7p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람은 없다니. 차별하는 사람은 차별적 발언을 하고서도 대부분 자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몰랐다, 고 항변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생기는 이유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여성으로 살면서 차별을 경험할 수는 있어도 내가 누군가를 차별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나는 비장애인으로 살면서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비정규직의 발언에 공감하지 못했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외국인, 다른 인종의 입장은 생각하지 못했다. 다수 집단이 소수에게 가하는 차별을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김지혜 작가는 강조한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인 일이라고.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고. 그래서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고 말이다.




'노 맨 존'은 왜 없을까?




 특권,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선택받은 소수만 누리는 혜택'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하지만 저자는 특권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가령, 일상적으로 지하철, 버스를 타는 것도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권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에 있어서 대개 알아차리기 어려운 특징을 보인다.


 미국 웰슬리 대학의 페기 매킨토시 교수는 백인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들을 수집했고, 백인 특권의 46가지 예시를 담은 글을 발표했다. 매킨토시가 만든 자세한 예시들 덕분에 많은 백인들이 자신의 특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성 특권 목록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다.


-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 나는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 내가 책임자를 부르면 나와 같은 성별의 사람을 만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조직에서 더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확신할 수 있다.

-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 내가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나의 외모가 전형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


  백인과 남성의 신체를 갖고 살아가는 동안 이런 특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반면,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이런 특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특권을 알아차리는 계기는 그 특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이다. 더 이상 주류가 아닌 상황이 될 때, 그래서 전과 달리 불편해질 때, 지금까지 누린 특권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난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후 내가 누린 특권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가 없을 때 별 제약 없이 다녔던 맛집, 카페, 숙소를 '아이와 함께라는 이유'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별은 대게 사회적 약자에게 벌어진다. 아이,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이렇게 항변한다. 일부 '진상' 손님이 문제지, 나이로 인해, 특정 조건을 가졌다고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진상'이 성인 남성이라면? 그때도 '노 맨 존'이라고 명시하며 영업할 수 있을까? 그 '진상'이 인근 대기업 직원들일 때가 많다면 '00 기업 출입 금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과연 공정할까?



 향후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면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과연 그럴까?


 중앙일보 1월 6일 자에 게재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학수의 칼럼 [고학수의 미래를 묻다] 인공지능은 차별, 편견을 인간에게서 배운다 를 읽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지난해 말, 안면 인식 인공지능의 문제를 지적한 보고서가 나왔다고 한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안면 인식 프로그램은 아시아, 아프리카계를 잘못 알아볼 확률이 백인 남성을 잘못 알아볼 확률의 100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데이터 자체가 편향되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성차별 논란에 휩싸였던 인공지능도 있었다. 아마존이 결국 폐기 처리한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이다. 인공지능이 습득한 과거 아마존 직원 데이터는 과반수 이상이 남성이었고 높은 직급일수록 그 편향성은 더욱 심했다고 한다. 이를 배운 인공지능은 성별을 따로 적지 않아도 여대를 졸업했거나, 여성 스포츠 동아리 이름이 들어가면 채용 추천에서 배제한 것이다.


 성별, 학력, 지역 출신 등을 배제한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과거의 자료가 특정 지역 출신, 특정 대학 출신이 많다면 이를 배운 인공지능은 지원자의 억양 등을 통해 출신지를 파악하는 등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쏠림과 왜곡을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공지능 채용이 더 '공정'하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하니 섬뜩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학수 교수는 결국 인공지능의 문제는 상당수가 사람의 문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현실적인 방법은 인공지능의 판단 결과를 보고, 편향·편견과 차별이 담겼다면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모델을 계속 수정해 나가는 길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인간의 손으로 잘 키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차별과 편견을 새삼 발견할 수도 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인공지능도 사회를 비추는 거울, ‘사회의 아이’인 셈이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기사까지 찾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키워야 할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 여성으로서, 엄마로 사는 나의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 아이는 조금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나부터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보자고 다짐해본다. 그런 생각을 갖고 책에 담긴 김지혜 작가의 글을 나지막이 속삭인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