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 많았습니다.
11월 늦가을 새벽, 수능날이 밝았다. 작년부터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인해 수능장 입구에서의 후배들의 우렁찬 함성과 열화와 같은 성원은 사라졌다. 대신 교사 몇 명이 교문에서 아이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몇 마디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만 허용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장 교문에 서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핫팩을 손에 꼭 쥐고 밀려 들어오는 학생들 틈에서 마스크 위로 빼꼼 내민 우리 학교 아이들의 익숙한 눈망울들을 열심히 찾아내 힘 내라는 말을 바쁘게 건넸다.
일 년의 결실을 맺는 날이다. 학생만큼은 아니지만 수능 날까지 함께 달려온 담임도 몹시 떨린다. 수능장이 너무 추운 건 아닌지, 또는 너무 더운 건 아닌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컨디션인지, 행여 결과에 실망하지는 않을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정문 폐쇄 직전 마지막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학생을 아련하게 바라본다. 자리를 정리하며 한 선생님께서 걱정어린 탄식을 내뱉으셨다.
잘 쳐야 될 낀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다. 담임이 수능 날 할 수 있는 것은 잘 치라며 목소리로,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 뿐.
최선의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10시 56분, 평가원 사이트에 접속했다. 2022학년도 수능 국어 영역 시험지가 업로드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1. 난이도
선택형으로 국어 시험을 치르는 첫 수능이다. 현재 시간 기준으로 올라온 2022학년도 수능 국어에 대한 난이도 평가는 '다소 어려움'이다. 문제를 모두 풀어보니 역시 비문학이 복병이다. 언어와 매체 유형은 1등급 컷이 80점대 후반이나 90점 정도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2. EBS와의 연계
EBS 연계율은 50%로 하락했으나 수능 기출 문제 다음으로 꼭 풀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수능 완성의 경제 지문이 긴밀하게 연계되었다. 홀수형 10~13번 환율 관련 지문이다. '금 본위 체제', '금의 가치' 등의 중요 키워드를 다룬 비문학 지문이 EBS 수능 완성에도 실렸다. 해당 지문을 열심히 푼 학생은 속으로 기쁨과 반가움이 동시에 들었을 것이다.
현대시는 이육사 '초가', 김관식 '거산호 2'가 출제되었으며 수필은 이옥의 '담초', 현대소설은 윤흥길의 '매우 잘생긴 우산 하나', 고전소설은 '박태보전', 고전 시가는 정훈 '탄궁가', 위백규 '농가'가 나왔다.
이중 김관식의 '거산호 2', 작자 미상의 '박태보전'이 수능특강 연계 작품이며 정훈의 '탄궁가'는 수능완성 연계 작품이다. 전년도에 비해 연계율이 감소하여 학생들의 체감 연계율 또한 매우 낮았을 것이지만 같은 작품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은 수능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EBS의 중요도는 여전히 높다고 볼 수 있다.
3. 작년 수능과 올해 수능
2021학년도 문학 작품은 현대시에서 이용악 '그리움', 이시영 '마음의 고향2-그 언덕', 현대소설에서 서영은 '사막을 건너는 법', 수필에서 유본학 '옛집 정승초당을 둘러 보고 쓰다', 고전시가에서 정철 '사미인곡', 신흠 '방옹시여', 고전소설 '최고운전'이 출제되었다.
현대시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테마가 반복된 것으로 보아 내년 수능을 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해당 테마를 놓치지 않고 공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전시가 역시 사대부가 작자층인 작품이 강세이다. 작년에는 임금 또는 속세와 단절된 처지를 노래한 작품이 출제되었다면 올해는 조선 후기 양란으로 인해 사대부의 권위가 하락한 양상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과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살길을 찾고 농촌 생활에 융화된 작품이 나란히 출제되었다. 문제 난이도는 어렵지 않았다. 평소 기출 문제와 EBS 교재를 충실히 공부했다면 무난히 풀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전 소설은 차례로 '최고운전', '박태보전'이 출제되었는데 둘 다 영웅소설의 면모를 보이는 소설이다. 고전소설은 풍자소설, 우화소설, 염정소설, 가정소설 등 종류가 다양하지만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 연달아 나온 점은 주목할 만하다. 2023학년도 수능을 준비할 때는 영웅 소설 작품과 관련 문제는 최대한 다양하게 읽고 풀어봐야 할 것이다.
4. 2022학년도 예시문항과 올해 수능
수능 역사상 '예시문항'이 등장하는 일은 흔치 않다. 첫 객관식 시험이 도입된 2009학년도 임용시험을 위해 평가원에서 객관식 예시 문항을 선보인 것을 연상하게 한다. 예시문항까지 제작된 만큼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 선택형 기조를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예시문항도 풀어보았지만 2022 수능 국어와 비슷한 문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예시 문항은 문학 영역으로 시작하며 비문학과 문학 지문이 교차 배치되었지만 수능은 독서 이론에 대한 비문학 지문으로 1페이지가 시작되며 비문학 지문과 문학 지문이 구별되어 배치되었다.
예시문항 중 22~25번 관련 지문을 올해 수능 국어의 트렌드로 짚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바로 같은 소재를 다룬 사설 시조를 여러 작품 소개하며 그에 대한 해설을 달아 놓은 지문으로 문학의 비문학화 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연합 모의고사에서 이러한 유형의 지문이 출제되었기에 올해 수능에도 해당 유형이 나올 것이라 예측했으나 이러한 예측은 6월 평가원 시험 이후 시들해졌다. 즉, 동일 소재를 다룬 사설 시조를 풀이하는 지문은 모두가 일 순위로 예상한 수능 트렌드였으나 결국 수능에는 나오지 않았다.
5. 6월, 9월 평가원과 수능
수능을 예측하려면 평가원을 보면 된다. 평가원 시험만이 수능의 지표이자 바로미터다. 1페이지에서 올바른 독서 태도에 대한 지문을 출제하는 기조는 6월, 9월, 수능까지 유지되었다. 비문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접근하면 되는 문제 유형이므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와 (나)로 주어지는 비문학 복합 지문 역시 6월, 9월, 수능 모두 동일하게 출제되었다. 난이도는 6월이 가장 어려웠으며 그 다음 수능, 마지막으로 9월 순이다. 6월 평가원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 그래서 바나나가 어쨌다구요?'라며 아우성 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올해 수능이 다 끝나면 아마 '선생님, 저 헤겔이 누군지 모르지만 싫어할래요.'라고 할 것이 뻔하다. 나도 어려웠으니까.
6월 평가원 시험 중 가장 어려웠던 지문은 단연 극악무도한 PCR 지문이다. 수능특강 연계 지문이었지만 연계 여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혼이 쏙 빠졌다. 9월에는 PCR 지문과 같은 난이도의 문제는 없었지만 수능에서는 PCR 난이도의 지문이 두 지문으로 공평하게 배치되었다. 기축 통화 지문과 360도 차량 영상 지문이다.
기축 통화 지문은 9월의 광고 지문과 같은 사회 경제 지문이지만 9월보다는 다소 어려웠다. 360도 차량 영상 관련 지문은 9월의 HMD 지문과 같은 과학 기술 지문이지만 9월보다 난이도는 훨씬 상승했다. 하지만 수능 비문학에서 6월 평가원 비문학만큼 어려웠던 지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간을 잡아먹는 문제가 몇 개 있어 시간 분배가 관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9월보다는 훨씬 어려웠으나 6월과 난이도는 같거나 다소 쉬웠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아직 등급컷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난이도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현장에서 치르는 수능 시험의 난이도는 집 수능, 독서실 수능의 몇 배는 될 테니까.
차량 통행의 움직임이 분주한 교문 앞에서, 옷을 든든하게 입고 양손 가득 책과 도시락통을 들고 수험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쯤 탐구 영역 첫 번째 과목 시험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이면 긴장이 풀리면서 마치 11월 모의고사를 치르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기도 한다.
차츰 붉어질 하늘을 바라보며 드는 감정은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과 '이걸 위해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했다니'라는 허탈함일 것이다. 이제 19년 동안 어깨에 지고 살았던 학업에 대한 부담을 벗어 던지고 정말 원하는 꿈을 향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너른 세상 속에서 훨훨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