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내게 무얼 선물해주었냐면

넋두리

by 백오

나는 좀 쉬는 법을 배워야한다. 어릴적부터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나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남한테 배우지 않으면 하지를 못하니. 내가 들어도 어이가 없지만 쉬는 법을 좀 배워야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게임만 하는 게 문제였는데. 지금은 왠지 모를 답답함이 가슴속에 언제나 남아있어 뭘 해도 온전히 즐기기가 힘들다. 불안과 혼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두려워 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닌 장기가 무엇이 있는지. 고민이다.


남자는 군대 전역하고 나서 취업하기 전까지가 삶에서 가장 비참한 시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반화하기에는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기는 한데. 나한테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것 같다. 내 할 일에만 몰두할 때면, 얼마든지 자신감이 있고 확신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관심 갖고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글은 어떻게 써야하는 것인지,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또, 요근래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상대방에게 느끼는 우정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하게 말할 수가 있는데, 한 번 확신을 잃으면 말문이 꽉 막힌다. 고등학생 때부터 컨디션에 따라 고저가 몹시 컸다. 에너지가 넘칠 때에는 내 말을 재밌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았는데, 이유도 모른 채로 힘이 축 빠져서 시체처럼 있을 때면 말장난으로 웃겨주고 싶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침묵했다. 고3 때는 매일 그랬다. '피로한 느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것이 '피로한 느낌'이라는 사실을 성인이 된 이후에야 깨달았다. 청소하는 법, 코 푸는 법, 가래 뱉는 법... DNA에 완전히 각인된 행동이 아니라면 하나하나 알려줘야만 깨치는 나에게 입시 공부는 시기상조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대학 공부도 시기상조긴 한데, 아무튼.


내 안에서 느껴지는 나와, 바깥에서 바라보는 나.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 균형은 깨져있다. 예전부터 깨져있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쟤는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내 안에서 느껴지는 나 -나에게도 나의 방식이 있고, 나의 견해가 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나 -나는 당최 전산학도인지 철학도인지 문학도인지. 아무런 권위도 없이 자기 견해를 피력해도 되는 건지. 스스로가 실력 있다고 과신하는 괴짜는 아닌지.


아주 피로할 때는, 그래서 감정이 정말로 밑바닥을 때릴 때는, 내가 사기꾼인 것만 같다. 철학을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네가 철학을 안다고? 이미 네 나이에 IT 기업 인턴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 트럭인데 네가 코딩을 한다고? 문장이건 시론이건 어느 하나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글 쓰는 방법을 논한다고? 예전부터 그랬지만 '모르면서 아는 척 했다'는 생각이 들 때 부끄러움이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 한동안 입을 닫고 숨어다닐 정도로. 큰 실수를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럴 때면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지. 내가 모르는 심오한 철학의 세계, 문학의 세계, 코딩의 세계가 있는데. 나는 그 세계의 문턱 조차도 넘지 못했으면서 과도하게 아는 척 한다고.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버릇도 좀 줄여야한다. 내 할 얘기만 하면 되는데, 꼭 남들한테 인정받으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언제나 장기를 갖고 있었던 것은, 모방하는 능력이다. 배우는 속도, 따라하는 속도. '쟤는 저렇게 하는구나'라는 것을 한 번 파악하고 나면, 그걸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느껴진다. 따라하다보면 내 실력이 꽤 많이 늘어있다. 모방 욕구의 원천은 보통은 열등감이다. '왜 나는 저렇게 못 하지?' 하는 마음 때문에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게 꼬이는 느낌이다. 돌아보면 그럴 때 가장 많은 성장을 했다. 감정 소모도 몹시 심했다. 열등감 자체도 고통스럽다. 게다가 내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감추려면, 말을 할 때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생각해야한다. 제대로 감추려면 자기 자신에게도 감춰야지. 마음 속에 스스로에게도 닫아놓은 방을 하나 마련해야한다. 거기서부터 스멀스멀 먼지 기운이 피어나온다. 몸 안을 감도는 공기 속 매캐한 분자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곁에 두고 마음 편히 배울 사람. 내 열등감이나 치부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를 내치지 않을 사람. 항상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오만 가지 상상을 다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명확한 목적이 있으면 쉬운데. 그냥 친해지려고 연락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돌아보면 한 18살 때부터 23살까지 쭉 대인기피증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얼굴 마주치면 친구들이 손 흔들며 인사하는 것조차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할 때면. 서운해하면 어쩌지?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곱씹히는 생각들이 한 뭉치였다. 그러다보니 대인관계에 아직까지도 너무 수동적이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면 친해지기 힘들고. 어느 정도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도 상황이 안 맞으면 다시 어색해진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불편해서 빨리 피하고 싶고. 생각해보면 눈도 2초 이상 마주치면 길게 본 거다.


부모님 중 누구를 닮은 기질인지 모르겠다. 솔직한 말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20대 중반 대학생에게 요구하는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 숨길 때가 많았다. 이미 군대도 다녀오고. 이제 이름보다도 '선배', '형', '오빠'로 불릴 때가 더 많고. 조금 더 의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하나 깨달은 게, 나한테 일반적인 기준을 들이밀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별난 사람이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남들 다 나처럼 살겠지' 했었는데, 나와 남 사이에 다른 점을 하나하나 발견해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특이한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가족들 틈에서조차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했기에 이제서야 차츰 알게 된 것 같다. 그 점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점을 받아들인 채로 행동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했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감추려고 할 때면, 집으로 돌아가면서 공허감이 크게 느껴졌다. 가슴 안에가 완전히 비어있는 느낌. 그런 감정이 아주 심할 때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여서 정신과 방문을 고민했던 적이 많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순전히 내면의 탐구이다. 나 스스로 나를 알아가는 것. 남들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이미 그런 식의 이해를 상당히 거친 채로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기질상의 특이점인지, 환경 탓인지, 노력이 부족한 이유인지. 당장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시야 가장자리에 언제나 노이즈가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경험. 그걸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비염이 극심한 탓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입시와 비염이 졸업과 수술로 해결된 20대 초반부터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본격적인 글쓰기와 사고를 시작했던 것도 그때이고. 출발점이 늦었던 것 같다. 아마 남들 18살보다 내 22살이 더 미숙할 것이다. 글을 통해 내가 나를 알아가면서 -감정과 사고가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고통 속에서 맴도는 일을 꽤 효과적으로 멈출 수가 있었다. 아주 많이 솔직해질 수 있었고, 정신과에 가지 않고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어. 완전히 나아지진 않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문장이 내 가장 소중한 친구다. 나름대로 낭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물으면 표면적으로는 '아주 불행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 불행에서 나오는 행복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 같다. 치열함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내 삶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 아닌가? 불행 덕분에.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유지하려면, 힘들 때 푹 쉬면 돼. 뭘 하려는 강박 갖지 말고, 남들보다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 말고.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라도 봐라. 기준을 성공에 맞추지 말고, 죽지 않는 것에 맞추어라. 그렇게 해야 될 때다. 대학교 합격했을 때, 군대 전역했을 때. 시험기간 끝냈을 때, 알바 마무리했을 때. 심지어는 설거지 다 했을 때에도. 축하했다거나 고생했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었는데, 막상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세상 탓을 참 많이 했는데, 사실 나를 가장 많이 학대하던 것은 나 스스로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타인의 말 또한 천금같은 무게감을 갖지만. 내 안에서의 생각 또한, 미처 고려하지 못하던 부분에 처음 닿았을 때. 울림이 몹시 큰 것 같다. 어린 시절 집에서 윽박을 듣던 때. 느낌으로만 기억하고, 가끔씩만 꺼내고, 꽁꽁 묶어두었던 그 감정을 '무서웠다'라고 처음 언어화하였을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입시가 시작하던 17살 때부터. 24살인 지금까지. 7년의 세월 동안. 사람을 향한 공포 속에서. 이유 모를 불안 속에서. 압박 속에서 초조함 속에서.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속에 던지며. 그때와 비슷한 감각을 오늘도 느끼며. 일기를 여기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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