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를 주세요

희곡

by 삼태성

인물

온은우 남자. 28세. 아이돌 출신 배우. 조연 기간 없이 주연으로 드라마를 시작했다.

서성범 남자. 34세. 은우의 매니저. 아이돌 시절부터 4년째 은우와 일을 해오고 있다.

때 봄밤. 벚꽃 떨어질 때.

곳 편의점 앞 테이블.

무대 테이블에 먹던 맥주캔, 새 맥주캔과 안주가 늘어져있다. 무대 한쪽에는 벚꽃이 있고 간간이 벚꽃이 떨어진다.

불 켜지면 은우 맥주를 마시고 있다. 성범은 안주거리를 들고 편의점에서 나와 은우 맞은편에 앉는다. 편의점에서 나올 때부터 휴대폰을 보고 있다.

성범 (휴대폰 보면서) 내가 오디션 보고 느낌 좋다고 했지.

은우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나 진짜 윤감독님 작품 하는 거 맞지?

성범 어~ 맞아. 그것도 주인공.

은우 갑자기 전화 와서 아니라고 하는 거 아니야?

은우 벚꽃나무를 가리킨다.

은우 저 벚꽃잎처럼 후두두두 다 떨어지는거 아니냐고.

성범 벚꽃나무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휴대폰을 본다.

성범 기사도 빵빵 터졌는데 엎으려면 이제 제작사 손해지~ 짠이나 해.

은우 (얼떨떨하게 성범과 잔 부딪히며) 이거 진짜 축하해도 될 일인가.

성범 맥주 마시며 다시 휴대폰 보다가 인상을 쓴다.

성범 근데 아이돌 유명세에 기대지 않고 조연 오디션 보러 갔다가 기회를 잡았다, 기사에서 이 문구가 빠지질 않네. 이것 때문에 쓸데없이 또 욕먹잖아.

은우 형, 형. 지금 축하할 때가 아닌 거 같아.

성범 아직도 아이돌 어쩌구 욕하는 사람들이 있어. 진짜로 조연 오디션 보러 갔다가 피디님이 주연으로 지원해보라고 하신건데. 별 걸 다 욕하네 정말.

은우 (일어나며) 형! 지금 축하할 때가 아니라니까!

성범 그제서야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은우를 쳐다본다.

성범 야, 네 필모에 첫 영화야. 어떻게 축하를 안 해.

은우 나 무서워.

성범 드라마 때도 잘했잖아. 첫 드라마에 신인상, 다음 드라마에 연기상 받는 거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은우 나 진짜 영화 아무것도 몰라.

성범 저거저거 또 암것도모름병 도졌네.

은우 너무 떨려. 사람들이 나 아무것도 모르는 거 눈치 채면 어떡하지.

성범 (대수롭지 않다) 너 드라마 처음 할 때도 지금이랑 똑같이 말했거든.

은우 그거야 하나는 교복이었고, 하나는 로코니까, 학교도 다녔고 연애도 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고. 이번에는 다르잖아.

성범 뭐가 달라. 이번에도 연애물인데.

은우 (맥주 내려놓고 심각해진다) 아니지. 이번에는 후회남주잖아.

성범 후회남주 좋잖아. 언제나 먹히는 캐릭터.

은우 그래, 그게 문제라고. 후.회.남.주.

성범 (은우의 말 슬슬 지겨워서 다시 휴대폰 본다)

은우 난 살면서 후회를 해본 적이 없잖아!

성범 (실소) 야, 너 내 앞에서만 그래라. 딴 사람이 들으면 진짜 욕해. 너 아직도 신인이야. 자뻑 안 먹혀.

은우 이게 사실인데 어떡해?

성범 (은우가 갖잖아서 귀 후빈다) 온은우, 저거는 분기마다 꼭 저렇게 또라이처럼 진지해진다니까.

은우 (자기만의 세상) 외고 가고 싶어서 외고 갔고.

성범 (성의 없이) 응~ 남들 공부할 때 놀면서도 외고 갔지.

은우 아이돌 해보고 싶어서 오디션 봤더니 바로 합격.

성범 운도 좋아서 연습생 두 달하고 데뷔했지.

은우 연기하고 싶어지니까 바로 드라마 들어오고.

성범 그것도 시작부터 주인공으로. 네 가능성은 내가 먼저 봤는데. 그래서 내가 사장님한테 너 연기시키자고 했던 거 아니야. 내 공도 있다.

은우 (성범 말 안 듣고) 두 번째 드라마는 시청률도 좋았어!

성범 연애도 안 끊기고 계속 했단 건 왜 빼세요.

은우 의자에서 일어난다.

은우 (맥주캔 들고) 그러니까 내가 후회할 틈이 있어 없어?

성범 네 입으로 그런 소리하면 안 부끄럽냐?

은우 내가 후회를 해봤어야 알지!

성범 (한숨) 저 새끼 저거. 진짜 밖에 나가서도 저럴까봐 무섭다니까.

은우 후회... (하늘을 본다)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성범 너 정말 진지하게 이러는 거냐. (은우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은우 갑자기 성범을 쳐다본다. 그렁그렁한 눈망울.

성범 너, 너, 뭐 이상한 거 부탁하려고 그러지. 또 이상한 눈 한다.

은우 형, 후회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성범 왜이래 또!

은우 (진지하게) 형 후회 많이 하잖아. 지난번에 민지 누나랑 헤어지고 나서도 한 달 앓았잖아.

성범 야!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은우 후회장인님~ (성범을 보며 손 모으고) 후회 좀 주시면 안돼요? 후회 많으시잖아요.

성범 그만해, 새끼야!

은우 (근엄하게) 매니저라면 나 연기 잘 할 수 있게 서포트해야지.

성범 그렇다고 나를 파냐.

은우 여전히 선 채로 새 맥주캔을 딴다. 맥주 거품이 부풀어오르면 급하게 몇 모금 마신다.

은우 형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야?

성범 아 쫌!

은우 제일 이불 차는 일이 뭐냐고?

성범 나 후회 안하거든.

은우 그렇지. 그래서 술 먹고 민지 누나 보고 싶다고 전화해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난 말리고...

성범 아오, 저 새끼 저거. 다시는 얘기 안하기로 해놓고.

은우 (성범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지며) 선경 누나 때는 술 먹고 누나집으로 간다는 걸 내가 뜯어 말리고~ 말리고~

성범 야!

성범 일어나서 은우 잡으러 돌아다닌다. 은우는 잡히지는 않고,

은우 (도망 다니면서) 참, 유진 누나도 있었네~

성범 (은우 못 잡고 멈춰서 숨을 고른다) 온, 온은우. 우리, 우리가 너무 오래 같이 일한 거 같지 않냐?

은우 (성범과 일정 거리 유지하면서) 아, 형. 내가 형 성격이 그렇다는 거지. 후회가 나쁜 거라는 건 아니잖아. 응?

성범 나쁜 게 아니면 왜 놀리는데.

은우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주라. 꼭 연애 아니더라도. 인생 통틀어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 있을 거 아니야. 나 진짜 몰라서 그래.

성범 (은우 잡기를 포기하고 노려본다) 아오 저거.

은우 아티스트 케어라고 생각하고? 응?

성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다. 은우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성범 새 맥주캔을 깐다.

성범 그럼 하나만 약속해.

은우 (고개 끄덕이며) 알았어!

성범 너 듣고 아무소리도 하지 마.

은우 알았어 알았어. 이제부터 듣기만!

성범 맥주를 몇 모금 더 마신다.

은우 엄청 후회되는 일인가보다.

성범 (은우를 째려보며) 듣기만 한다며?

은우 이제부터 진짜! (입을 꾹 다문다)

성범 (한숨을 푹 쉰다) 너 내가 가족 얘기 하는 거 들어본 적 있어?

은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성범 내가 너한테 여자 얘기, 친구 얘기 다 해도 가족 얘기 한 번도 안 했지?

은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

성범 야, 대답은 해도 돼.

은우 어후 답답했어.

성범 내가 가족 얘기를 안 한건...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야. (사이) 난 가족이 없거든.

은우 어? 형 엄마, 아빠 다 계시잖아. 에이, 우리 일한 게 몇 년인데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성범 나 스무 살 되자마자 서울 올라왔어. 그 후로 고향에 내려가본 적도 없고. 뭐 이제 고향이 없달까.

은우 형 고생한 거 나도 들었지. 사장님이 형이랑 같이 일해보라고 하실 때 얘기해주셨는걸. 대학교 학비 자기가 다 벌어서 다녔다고. 성실한 형이라고.

성범 대학교 합격하니까 엄마가 나보고... 그만 나가랬어.

은우 집을? 자취하라는 거야?

성범 그런 의미 포함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주 한 모금 더 마시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딱 알겠더라.

은우 서울로 학교 다녀야 하는데 자취하라고 할 수도 있지.

성범 그래도 엄마는 많이 참았지.

은우 (이해가 안되서 고개 갸우뚱)

성범 내가 말했거든. 엄마한테... (사이) 아빠가... 모르는 여자랑 모텔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은우 (놀란다)

성범 그때가 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딱 이 맘 때. 벚꽃 떨어질 때. 내가 말해놓고 감당이 안 되는 거야. 엄마한테 말하자마자 집 나와서 밤새 걸었어. 우리집 뒤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거기 벚꽃 보라고 걷는 길이 잘 되어 있거든. 거기를 왔다갔다. 갔다왔다. 아빠는 보기 싫고, 엄마는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고.

은우 형...

성범 아침에 집에 들어가니까, 아빠 회사 갔을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거든. 엄마가 평소랑 똑같이 아침 먹으래서 먹고 학교 갔어. 내가 미친 놈인게 엄마가 뻔히 힘들 줄 알면서 엄마랑 아빠랑 무슨 일 일어날까봐 무서워서, 엄마가 모른 척 해주길 바랬던거야. 그러면 엄마한테 말을 하지 말든가. 혼자 알고 있기 괴로우니까 엄마한테 말해놓고 알아서 감당하라는 거잖아.

은우 형이 어린데 어떻게 혼자 알고 있어. 나 같아도 말했어.

성범 그럼 엄마한테 당장 아빠랑 이혼하라든가, 나는 신경쓰지 말라든가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냥 다 무서워서... 하루아침에 우리집이 없어질까봐.

은우 그게 어떻게 다 형 책임이야.

성범 엄마가 나 대학 합격할 때까지 2년을 기다려줬어. 엄마가 나보고 그만 나가랬을 때 바로 알겠더라고. 집을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는 걸. 엄마 인생에서 나가라는 거지. 엄마는 아빠를 2년 동안 견디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이) 나까지 포기하게 될 때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은우 ...

성범 난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엄마가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야 이미 알았을거야. 엄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던 엄마가, 속으로는 얼마나 울고 있었을지 난 알고 있었어.

은우 형 탓이 아니래도.

성범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날로 돌아가서 엄마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싶다.

벚꽃나무 있는데서 바람이 불어오고 은우와 성범이 있는 테이블까지 벚꽃잎이 굴러온다. 성범 그 모습을 가만히 본다.

성범 은우야. 내가 도와줬으니까 이제 후회, 잘 할 수 있지?

은우 ... 형... 미안해.

성범 뭐가? 나 또 후회하게 해서? (웃는다) 야, 이제 봤지? 후회 해봤다고 후회 잘하는 거 아니라는 거.

은우 이제 형 말 잘 들을게. 안 까불고 연기 잘할게.

성범 탈탈 털어먹을 땐 언제고 이제와서! (웃는다)

은우의 휴대폰 붕붕 울린다. 은우 휴대폰을 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성범 이 밤에 누구야?

은우 (미안한 표정, 목소리 작아진다) 엄마...

성범 뭐야~ 빨리 받아. 너 안 받으면 어머니 나한테 전화하신다.

은우 전화 받으며 일어난다.

은우 엄마~ 기사 봤어?

은우 통화하며 무대 바깥으로 나간다.

성범 걸어가는 은우를 보다가 자기 휴대폰을 본다. 그러다 체념하고 주머니에 넣는다.

벚꽃나무에서는 꽃잎이 쏟아지듯 날린다. 성범 꽃잎을 잡아보려 하지만 빈손이다.

암전.




표지 사진 : 작가 wirestock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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