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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림 Nov 04. 2023

순수함 되찾기

가장 순수하게 일을 좋아했던 그 시절 나에게 빙의하기


유퀴즈에 박진영과 방시혁이 나온 편을 보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엔터업계 두 거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왠지 자극을 받아서 메모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휘갈겨 적어놓았다.


그중 하나는 업에 대한 순수함 같은 것인데,

대략 방시혁이 사업이 잘 안돼서 고민할 때 "왜 요즘 만날 때마다 사업 얘기만 하냐? 너 음악인이잖아."라고 한 마디 했고 그 말을 듣고 정신 차린 방시혁은 다시 음악에 집중해 '2AM의 죽어도 못 보내'를 론칭하며 성공했더라 라는 이야기다.


이 말을 듣고, 나 역시 뼈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일을 시작한 지 9년 차 내년이면 꽉 찬 10년 차다.

고백하자면 요즘은 어디 멋진 스토어를 가도, 멋진 브랜드가 탄생해도, 심지어 해외여행을 가도 새로운 자극을 받기가 어렵다. 그런 것들이 전만큼 재미가 없어서 집에만 있었던 것도 있다.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기다려서 매거진을 사야지만 알 수 있었던 고급 음악, 전시, 문화 정보들도 쉽게 알 수 있고.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구글 디깅만 잘하면 멋진 레퍼런스들은 금방 찾을 수 있고. 내가 마케팅을 몰라도, 디자인을 몰라도 각종 온라인 클래스 등을 통해 맘만 먹으면 배울 수 있고. 해외 가야지만 느낄 수 있었던 바이브를, 서울 이태원, 성수 등에 가면 쉽게 느낄 수 있고. 정보를 구하기가 손쉬워진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역치도 높아지고 역으로 감각도 무뎌진다.


그래도 마케팅 에이전시 업을 하고 있는 지라, 트렌드는 기계적으로 리서치할 때만 한정적으로 빠짝 하고 가능한 핸드폰을 멀리하는 전략을 썼다.


대신 요즘의 나는 사업이 잘 맞고,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꽤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규모가 점점 커지고,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지인이 아닌 클라이언트가 생기고, 점점 포트폴리오와 노하우가 쌓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쩌면 '나마저도 속인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쓴 제안서가 안되거나, 함께 했던 멤버가 나가거나, 클라이언트에게 만족을 못줬거나, 프로젝트의 성과가 나지 않거나, 영업이 들어온 브랜드가 좋거나 안 좋거나. 기분이 왔다 갔다 했고 재미가 없는 순간도 많았지만, 티를 내면 안 된다 생각했던 게 강했는지 무던하게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티브이를 보다가 유퀴즈에 나온 말이 불씨를 지핀 것 이다.

맞지 나도 순수하게 브랜드를, 브랜딩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기억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쭉 내려다보면서, 사회 초년생 시절 열정 많고 호기심 많았던 나를 발견했다. 마스다무네아키 <라이프스타일을 팔다> 책을 보고 오로지 츠타야에 가고 싶어서 도쿄에 가고, 거기에 앉아 한 마디도 읽을 줄 모르는 일본 잡지 사고 앉아서 스타벅스 커피만 마셔도 충만함이 차오르고 그랬던 때. 전주국제영화제 놀러 갔다 너무 좋아서, 그 경험을 전달하고 싶어서 영화제에 연락해서 투어 상품으로 만들었던 때.


콘텐츠 기획 일만 했던 나한테 덜컥 서촌에 친환경 편집숍을 같이 하자고 해줘서, 미풍양속이라는 가게 콘셉트를 떠올리고 실제로 구현하면서 일 끝나고 또 일을 하며 힘든 줄 몰랐던 시간들. 첫 전시를 기획하고 소개글을 쓰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에 온 마음을 담아서 수정하며 밤새 글을 썼을 때.


그때는 모든일을 그런 식으로 했다. 너무 좋아하는 걸 일로 연결 시켰다. 나도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 브랜딩, 콘텐츠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꾸 때가 낀다. 성공에 대한 욕심, 경쟁심, 조바심, 부러움, 박탈감, 자괴감 같은 것들이 낀다. 아무래도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너무 많은 성공 법들 때문에 사업, 브랜딩, 콘텐츠가 돈과 성공으로만 연결되는 것 같아서 뭘 보는 게 괴로웠던 것 같다.


그런거 다 빼고 나면, 결국 내가 사업, 브랜딩, 콘텐츠를 통해 하고 싶은 건 이야기에 가깝다.

나는 이야기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걸 상상했던 분위기에 맞게 실제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좋다. 그래서 그런 속성과 비슷한 브랜딩 업이 제일 좋다.


콘텐츠 역시 스토리텔링하는 과정이 좋다. 시작할 땐 이런 느낌으로 하고, 이 씬에 이 카피를 붙이고, 그다음엔 이런 디자인이 나오고 이런 게 좋다. 사업은 기회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어서 좋고 그게 나중에 하나의 이야기가 되니까 좋다.


아마 은퇴하고 할머니가 되고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면, 그때 유일한 취미이자 친구가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지속가능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지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순수함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이런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다면, 앞으로 쉽게 조바심을 내지 않을 것 같고 과정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일을 시작할 때 설렘도(아직 100%는 아니지만) 막 생긴다.


방금 김가네에서 파트너랑 일 말고 다른 얘기하다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설렜다. 옛날에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 만화책 진짜 많이 빌려봤는데 요즘 모든 서비스가 다 플랫폼화 되었잖아. 아직도 서비스화가 안된 산업이 있을까? 그런 얘기들.


브랜드 네이밍 프로젝트를 위해 내일은 도서관 가서 각종 설화들을 살펴봐야지 근사한 이름을 만들어봐야지 설렘이 생긴다. 순수하게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재미있다.


다시 그저께 유퀴즈에서 봤던 감상으로 마무리를 하자면.

박진영이 지금까지 롱런할 수 있는 것도, 여전히 트렌드에 정점에 있는 것도. 그런 순수함이 있어서가 아닐까. 반면에 방시혁은 머리로 멜로디를 떠올리고 노래 가사를 쓴다고 하는데, 누군가에게 들은 걸로 가사 쓰고 그랬단다. 둘 다 위안이 되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경험한 이야기만 만들 수 있었지만, 10년 차가 된 나는 치기 어린 사회초년생 때와는 그래도 좀 다른 맛이 있어야하지 않나. 그렇다면,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도 머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다. 실용서 말고 인문학이나 여행이나 사람들의 대화나 거리의 변화나 핸드폰 밖에 것들에 좀 더 집중해야지. 그 마음 잃지 말아야지.


유퀴즈 PD님 고맙습니다.

(이래서 콘텐츠가 좋다니까ㅎㅎ)



<사진 : 2015년 전주국제영화제 보러 갔었을 때 인스타그램 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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