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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an 13. 2021

누구에게나 자기 계발서 모먼트가 있다

중국어 HSK 6급 고득점 도전 수기

요즘의 나는 책도 거의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하루 종일 중국어 자격증 HSK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중 작문 영역을 공부하다 보면 중국 유명인들의 성공 일화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런 성공담은 워낙 자주 출제되는 문제 유형이다 보니, 반드시 외워둬야 하는 필수 표현들이 있다. “同学们都嘲笑他” (친구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他坚持努力”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다). 늘 이런 식이다.


지난주 토요일에 보고 온 시험에도 딱 이런 문제가 나왔다. 어느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실 파티시에가 되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꿈을 비웃었지만 그는 결국 본업을 그만두고 파티시에 준비학원에 들어갔다. 어느 날 노교수가 "시장에 출시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외형과 새로운 맛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는데, 그 반 학생들 모두가 그건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을 때, 오로지 주인공 한 명만이 그 과제에 뛰어들었다. 결론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결국 그 주인공은 수많은 시도와 실패 끝에 세계 유일의 참신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냈고, 크게 성공했다. 어느 기자와의 매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품어둔 꿈은 있다. 그 꿈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나간다면, 어느덧 그 꿈은 실현될 것이다. 짜잔.


지금 내가 세 달 가까이 이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이런 유형의 성공 일화를 수십 개째 읽고 있는데, 이런 글을 읽고 나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거나, 혹은 자극을 받았다거나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그렇잖아. 그 사람의 성공은 그 사람의 성공인 거고, 내 인생은 그냥 내 인생이니까. 나는 위의 파티셰가 되고 싶었던 물리학자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운이 좋았던 단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를 크게 믿지 않고, 자기 계발서를 즐겨 읽지도 않는다. 믿는 건 나 자신뿐이다.


그러나 자기 계발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각자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다 자신만의 '자기 계발서 모먼트'가 있을 것이다.


내 삶도 알고 보면 크고 작은 '자기 계발서 모먼트'들로 점철되어 있다. 친구들이 모두 나를 비웃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서 성공한 경험, 나도 가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외고에 합격한 경험이다. 그 감동은 어찌나 강력했던지, 그때가 2001년이었는데 나는 그 20년 전의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도덕 수업 시간이었고, 내 자리는 교실 뒤에서 세 번째였다. 수업 중에 핸드폰으로 문자가 도착했고, 나는 책상 밑에서 몰래 핸드폰(폴더폰)을 열고 초록색 화면에서 엄마의 문자를 확인했다. 지원했던 외고에 합격했다는 메시지였다. 그때부터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수업 종이 치자마자 엄마에게 전화해서 여러 번 되물었다. 정말 합격한 거 맞냐고. 인생에서 (겨우 1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애타게 노력했고, 그 노력이 열매를 맺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그 순간이 나에게 더욱 특별했던 건, 정말 말 그래도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파티셰가 되고 싶었던 물리학자' 스토리의 진부한 레퍼토리 하나하나 다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학교에서 평균 성적이 전교 50등 밖에 머물렀고, 가장 좋았던 성적이 전교 24등이었다. 내가 외고에 지원하겠다며 교무실에 방문했을 때, 담당 선생님은 "네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았다. 결국 마지막에 학교에서 나 혼자만 해당 외고에 합격했을 때, 나를 가장 무시하던 물리 선생님이 나에게 웃으며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던 일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런데 그때의 감격적인 외고 합격 경험이 이후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냐 하면 사실 잘 모르겠다. 난 그 후에도 살면서 여러 번 별로 노력도 해보지 않은 채 중도 포기를 하기도 했고, 셀 수 없는 실패와 탈락의 순간들을 통과해왔다. 그러다 대학교 때 인턴십을 하게 된 어느 광고 회사에서는 회의실 벽에 이런 문구를 마주하기도 했다.


 Whatever made you successful in the past, won't in the future
(Lewis E. Platt).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과거의 성공 경험 하나하나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다이어트 후 요요만 봐도 그렇다. 성공하는 건 쉽지 않지만 성공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과거의 경험을 빛나는 상장처럼 여기며 이미 지나간 일에 의지하는 건 정말 부질없다 치더라도, 사실 현생을 살아가며 '자기 계발서 모먼트'를 계속 생성하고 수집하는 건 그래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사실 얼마 전에도 나에게는 신기한 '자기 계발서 모먼트'가 하나 추가되었다.


중국어 HSK 자격증 6급 시험은 300점이 만점인데, 총점 180점이 넘으면 합격이다. 작년 10월 시험 당일로부터 열흘 전에 급히 시험을 접수하면서, 나는 180점만 넘어도 기적일 거라 생각했다. 중국어라고는 니하오밖에 모르는 남편은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200점은 기본 아냐? 남은 열흘 동안 열심히 해서 200점은 무조건 넘겨야지"라며 장난스러운 압박(!)을 가했다. 남편은 정말 매일 같이 틈만 나면 '200점 화이팅'이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고, 나는 남편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들은 채 벼락 치기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는? 성적 발표일 당일, 나는 화면에서 말도 안 되는 점수, 225점을 확인하고 혼자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시험을 한 번 더 치르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250점은 넘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남편은 옆에서 또 한 번 '놀리듯이', "그러면 이번에는 280점은 받아라!" 라며 주문을 걸었다. 남은 기간 동안 정말 죽자고 공부하면 250점 넘을까 말까인데, 280점이라니 정말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 유튜브의 어떤 영상에선, 중국인 원어민이 HSK 6급 문제집을 한 권 풀고 시험을 보러 가서 280점을 받은 모습이 나온다. 중국 유학생들도 280점 받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남편은 속도 없이 틈틈이 노래를 불렀다. 280점. 280점. 280점.


문제는 어느덧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숫자에 세뇌를 당했다는 데 있다.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네임펜을 들고 포스트잇에 280이라고 커다랗게 써서 책상 위에 붙여두었다. 좋아하는 책도, 드라마도 모두 잊고 한 달간 공부에만 매진했다. 밥을 먹을 때는 유튜브로 기출문제 해설 영상을 틀어놓았고, 어쩌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도 듣기 MP3를 틀어놓거나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며 이동했다. 1월 9일 시험 일주일을 남겼을 때부터는, 매일 모의고사를 두 개씩 풀었는데 한 번은 듣기와 독해가 모두 만점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정말이지 280점을 기대하기 시작해버렸다.


이 스토리의 엔딩은?

시험은 화끈하게 망쳐버렸다.

시험 후기들마다 최근 들어 제일 낮았던 난이도라 했고, 나만 정신 똑바로 차렸으면 진짜로 280점을 넘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치명적인 실수들을 너무 많이 했다. 하하. 하하. 악!!!!!!!!!!!!!!! 지금도 밥을 차리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공부를 하다가 순간순간 혼자서 악!!! 하며, 아 그때 그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며 가슴을 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돌이킬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11만 원이나 되는 시험 접수비용에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2월 시험을 등록하는 일뿐......


결국 유명인의 성공 경험담이든,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든, 나 자신의 과거 성공 경험이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태도"든 내가 원하는 순간 딱 내가 원하는 결과를 보장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가끔씩 또 살면서 재밌고 기특한 나만의 '자기 계발서 모먼트'를 몇 개 더 만들면서 이렇게 글로 남겨둘 수는 있겠지. 그러다 운 좋게 노년에라도 '성공' 비스무리한 걸 하게 된다면, 세바시나 TED 같은 데서 이렇게 서두를 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삼십 대에 중국어 자격증을 준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깨달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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