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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소리 6

by 정윤

아버지는 24세 때에 <무기신식>이라는 무예서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선조 때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를 저본으로 곤봉, 장창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 월도, 쌍검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무예서입니다. 이 책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훌륭한 책입니다.


할바마마와 아버지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대리청정을 할 때부터였다고 들었습니다. 15세의 아들은 아버지 임금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옥좌에 앉게 됩니다. 대리청정은 재앙의 서막을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날개가 아니라 아버지의 목을 조여 오는 올가미였던 것입니다.


할바마마는 세자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 뒤에 앉아서 사사건건 개입하고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대리청정 첫날, 근정전에서 의욕에 찬 아버지는 극심한 가뭄에 세금을 감면하고 전국에 규율미를 풀어 줄 것을 지시했습니다. 신하들은 아버지의 결단력을 칭찬하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하지만 할바마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세자는 잠시 물러나 있거라."


신하들 앞으로 나와 세자의 지시를 조목조목 반박하셨습니다. 왕의 눈치만 살피던 신하들은 세자가 내린 결정을 뒤집어 버리는 할바마마를 보며 당황했습니다. 할바마마는 세자인 아버지를 정치적 미숙아로 치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은 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함부로 나서지 말거라."


신하들 앞에서 할바마마의 공개적인 선언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자가 하는 모든 일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고, 세자가 하는 모든 일은 미숙하고 불순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세자의 결정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한마디로 세자인 아버지는 허수아비였습니다. 비록 옥좌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런 결정권도 없는 패배감이 아버지의 온몸을 지배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할바마마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자를 어찌 알고 그런 결정을 내리느냐? "


아버지는 할바마마의 그 말이 환청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일곱 살 때 한 번 그 장면을 봤습니다. 근정전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안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바마마가 아버지를 꾸짖는 소리였습니다. 신하들은 조용했습니다.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할바마마는 걸핏하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야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떨면서 양위 선언을 철회해 주실 것을 애원했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한 번은 제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흐린 구름이 몰려왔습니다. 비가 쏟아질 듯했습니다. 할바마마가 또 양위를 선언하셨습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단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았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졌습니다. 주위는 진흙탕이 되었고 아버지의 옷도 다 젖어들었습니다.


"상감마마, 아니되옵니다! 소자가 아직 부족하옵니다!"


아버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거적을 깔고 걸핏하면 석고대죄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앉아 석고대죄를 해야 하는 아들의 심정, 생각해 보셨습니까.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한순간이라도 헤아려보셨습니까. 아버지는 다음날에도 시민당 뜰에서 대명 했고,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날에도 여전히 시민당 뜰에서 대명 했습니다.


그런 순간을 수없이 겪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가슴속에 울화병이 있었습니다. 모든 응어리를 꾹꾹 눌러 참으며 살았기 때문에 생긴 지병이었지요. 한나라의 세자로 태어나 남들이 겪어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 아버지의 인생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노론 세력에게 장악당하신 할바마마와, 그에 반대하고 노론 당파의 척결을 지향한 아버지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소론의 정치적 입장에 기울었다고 여긴 노론 일파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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