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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리 Feb 12. 2019

동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

  부끄럽지만 작년 말에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 응모 부문은 '시'였고 네 군데 신문사에 대략 20편의 시를 제출했다. 결과는 모두 당선 실패, 며칠 좋은 꿈 꾼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것은 만약 한 군데서라도 당선을 맛보았다면 서두에 쓴 부끄럽다는 말이 자랑스럽다는 말로 바뀌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 부끄러움이 단순히 꺼내놓기 쑥스러운 감정을 넘어 도달하고 싶었던 선에 미치지 못한 부끄러움이었다면 나 또한  순수한 동기와 열정, 도전의 아름다움을 논하기에는 멀리 와버린 사람일지 모른다.

  도전은 성공해야 자랑스럽고 열정은 정녕 '벌이'로 이어져야 아름다운가. 순수한 동기와 열정은 내 스스로에게도 그 자체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니 마치 동화가 끝나버린 다음 페이지의 세상이 된 것처럼 서글펐다. 그러나 예리한 사람은 발견할진대, 나의 동기와 열정이 순수하지 않았던 만큼 실패의 씁쓸함도 순수하다 말할 수 없다. 무언가 움켜쥐길 바랐던 만큼 남는 게 없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다행히 동화에는 나 같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주어진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며 도전하고, 꿈꾸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물론 동화도 성공신화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들은 어려움을 겪지만 잘 이겨내고, 악당들을 물리치거나 왕족과 결혼하거나 금은보화를 얻는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플란다스의 개'나 '성냥 팔이 소녀'같은 동화의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그런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마저 동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동화의 생명은 결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화는 주인공이 갖고 있는 환상과 꿈, 순수한 동기와 열정을 통해 생명력을 얻게 된다. 만약 동화 속 인물들이 그런 마음을 잃고 동화에서 빠져나온다면 그들 또한 우리처럼 너저분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느 외로운 도시에서 저녁을 먹다> 


붐비는 도시에도 외로움은 있어.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거나

믿었던 톱니가 모든 계획을 으깨버리곤 해시태그도 달지 않지.

라면에 떠다니는 계란 조각들은 도시의 부유물 같은 나를 닮았어.

성냥팔이 소녀는 어엿한 라면집 사장님이 되었지만

월세에 허덕이며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해.

건물주를 알면 좀 놀랄걸. 그 유명한 신데렐라지 뭐야!

왕자와 이혼하곤 위자료를 두둑이 받았대나 어쨌대나.


세상은 동화야. 단지 아름답지 않을 뿐이지.

다들 개척자 행세를 하다가도 저 유리 처마에 쌓여가는

낙엽의 사체같이 금방 시들시들해진다니까.

다들 하품 치며 나갔다가 하품 치며 돌아오고 있어.

대부분 저 낙엽처럼 가련한 운명이야.


이 외로운 도시에서 난 쫓기는 걸까, 지나가는 걸까.

찾아온 걸까, 아님 돌아가는 걸까.


아아, 내 소개가 늦었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한데

내가 바로 신데렐라와 결혼했던 그 왕자야.

한때는 유리구두 들고 동네방네 그녈 찾으러 다녔었는데,

아름다운 추억은 흙바람 저며가는 저 배수로 어딘가 처박힌 지 오래군.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왕정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지.

지금은 바야흐로 공화정 시대야. 투표로 대표를 결정하지.

말하긴 좀 속 쓰리지만 아버지는 안 좋게 끝나셨어.

지나간 권력에 미련을 두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가셨지.

시대가 저무는 건 구름 낀 도시가 비에 젖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건데.

받아들여야지.


아버지 편드는 깃발부대들이 아직 광장을 활보하고 있긴 해.

자기들끼리 돌려 보는 자료가 있는데 관계자인 나도 모르는 얘기가 많더군.

사실 뭘 아는지는 십자군에게 중요치 않지. 뭘 혐오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혹시 나에게 손을 내민다면 외면할 생각이야. 아버지처럼 되고 싶진 않거든.


아직도 화형이 거행되는군.

불은 왼쪽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태우고 싶은 것을 태워버려.

대신 공포를 남기지.

역시 시대와 상관없이 공포는 가장 좋은 통치수단이야.

오죽하면 내가 위장이혼까지 했겠어.


그래도 전보다 좋은 세상이야.

퇴물이 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하지만 확실히 열매는 달군.


왕자 시절에 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았지.

왕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모든 계획을 변경해야 했어.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에서 굴러야 하잖아.

난 대모를 시켜 믿을만한 여자를 찾았고, 그녀는 시험을 통과했지.

춤을 추다 그렇게 헐레벌떡 돌아가다니! 분수를 아는 여자였지.

내가 찾던 완벽한 여인 신데렐라!

이 가련한 인생의 나이팅게일!

난 그녀와 결혼했고 위장이혼 한 뒤 모든 재산을 위자료로 넘겼지.

그리고 이렇게 몰래 만나러 와.


저녁 잘 먹었군.

좋아. 꼭대기 층으로 올라갈 시간이야.




  굳이 신춘문예 당선 실패작을 가져와 주절거리는 것은 너저분한 현실 속에 '남은 게 없어서' 서글픈 내 정신승리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나는 사실 이 시의 화자가 아니라 그가 관조하고 있는 낙엽의 사체 같은 사람이기에 누가 세상에서 동화를 벗겨내는지는 알 수 없고 감히 그 손길을 거역할 수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 작은 정신승리들의 밑천으로 연명해가는 이 시대의 소시민으로서 나는 그 밑천이 다해 영혼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무언가 쥐고 있고, 시스템의 덕을 보는 비교우위에 있는 자들, 동화에서 빠져나온 저 신데렐라와 왕자 같은 얄미운 존재들은 그래도 눈에 띄는 곳에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더 거대한 세력, 한 시대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이들에 관하여는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다만 고민해보니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Money talks", 즉 돈이 말하고 돈이 질서를 정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통화 시스템, 그것을 주도하는 세력에 의해 나는 조종당하듯 무언가를 포기하고 제공된 틀에 순응해간다. 그러니 이 시대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자들은 자본의 유통을 주도하는 자들이다.

  통제자들은 자본을 생산하고, 자본가들은 그 돈으로 상품들을 대량 생산한다. 그리고 나 같은 대중에겐 부역의 대가로 소정의 자본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자본가들의 생산품을 소비해주기 위한 수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며, 이로써 나는 소비자라는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대중에게 주어진 대가란 그들의 생활로 직결되는 것이기에 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비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단순히 자본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닌 자본을 위해, 또 그 자본을 통해 '삶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열린 사회든, 경직된 사회든 돈이 말하는 사회에서의 소비자란 '저 위에 있는 자들'의 소모품이자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들이 만든 매체는 준 것을 도로 거둬가기 위해 작동하며, 대중들은 분명 소비의 방식을 자의로 선택하고 있지만 자본가의 손바닥 안을 벗어나진 못한다. 충분한 양의 자본이 지속적으로 순환하며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준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욕심을 부리고, 남들 위에 있고 싶어 하며,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에 투영된다. 결국 시스템의 하층부에 위치한 소비자, 즉 대중에게 주어지는 것은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많은 현실', 혹은 '삶을 소비한 만큼 남는 게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그들의 고단하면서도 불안한 삶으로 귀결된다.




  자유파와 보수파가 협상에 성공해서 그들의 단결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던 그 해에,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일곱 차례에 걸쳐서 반란을 일으켰다. 어느 날 밤, 그는 라오하차로 배를 끌고 가서 집중포화를 때리고는 방위사령부를 점령하여, 열네 명의 자유파 우두머리들을 집에서 끌어내어 총살시킴으로써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먼 자유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백 년 동안의 고독」 중.



  이제 반란에 관해 이야기할 때다. 사실 늘 그래 왔다. 불합리한 사회구조로 인해 하층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종종 반란을 일으켰고, 때때로 승리했다. 많은 시대를 거쳐오며 수없이 벌어졌던 반란들에 비추어, 우리의 반란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현재 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다. 따라서 비난도 쉽고, 반란도 쉽다. 그러나! 승리는 어렵다. 무력 통치가 횡행하던 억압된 시대를 포함하여 과거 어떤 시절보다 지금의 사회가 지배 계층에 대항하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탐욕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본가의 탐욕만이 아니라 대중의 탐욕도 포함된다.

  노동의 착취 시대는 많이 저물었지만 왜 대중은 여전히 양극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동안 있어왔던 착취가 결코 노동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산업화된 세계의 자본주의는 대중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욕망도 착취해왔다. 그리고 대중의 욕망은 착취됨과 동시에 그 착취에 열렬히 반응해왔다. 견물생심이란 다른 말이 아니다. 상품이 있는 곳에 없던 욕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통제자와 자본가가 그럴듯한 구실, 혹은 상품들로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면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왔다. 대중의 '소유하려는 욕망'은 지배계층의 '지배하려는 욕망'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이 저들의 욕망 안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비 사이로 젖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 것만큼이나 허상에 가깝다.

  얼핏 대중의 도전이 통제자와 자본가의 공고했던 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듯 보일 수도 있다. SNS의 발달로 대중은 하나의 신경망처럼 이어져 사회적 이슈에 대해 즉각적으로 민심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고 지배계층의 '갑질'이나 불법행위를 즉각 성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도 예전보다는 대중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그럼 이것을 반란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대중은 결코 그들을 끌어내릴 수 없고, 반란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욕망을 저당 잡혀있기 때문이다. 한 평 더 큰 원룸으로 이사했다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안락의자를 검색하던 나를 예로 들자면, 제한된 공간에서 일말의 안락함이라도 더 소유하고자 나는 대출을 받고, 상품을 고르고, 신용카드를 긁으며 그들이 펼쳐놓은 그물에 온몸을 던지고 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가 펼쳐놓는 문명사회는 내게 무한한 풍요와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는 듯하나 불확실성의 위협은 거의 대부분의 가능성을 신기루로 만들고 있으며, 내 운신의 폭을 안락의자의 쿠션 정도에 머물게 하고 있다. 이렇게 '저 위에 있는 자들'이 정해놓은 경계 안에서 살며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 내에서 욕망하고 소유하는 한 반란은 일어날 수 없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반란군을 이끌고 신출귀몰하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도 결국엔 집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자폐적인 고독에 빠져든다. 허무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우리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란은 힘들게 얻은 일말의 안정감마저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효과적으로 산업화를 촉진시켰고 인류에게 전에 없는 고도의 물질문명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대중들도 분명 그 수혜자 중 하나다. 계층 구조 전복에 초점을 맞춘 반란은 대중에게 있어 최고의 효율성과 편리함을 지닌 문명의 제공자가 사라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원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에서의 도피」에 쓰여진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중산 계급은 보수적이며, 그들에게 있어 세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늘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다. 나 또한 반란을 이야기하면서도 첨단으로 치닫는 과학기술문명 자체에 대해서는 섣불리 비판하고 싶지 않다. 더 옳은 방향으로 사용해야 하는 과제는 남아있지만 기술문명은 어쨌든 인간의 도전정신으로 일궈낸 세계이며 그것을 발전으로 여기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성경-잠언 4:23]



  그렇다면 반란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가. 그렇진 않다. 다만 무엇에 대한 반란인지가 중요하다. 노동 착취에 대한 반란이 지배 계층에 대한 것이었다면 욕망의 착취에 대한 반란은 탐욕 그 자체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민주정부가 자리하지 않으며 언제나 왕좌에서 내려지는 명령에 따르고 있는데, 우리는 그 왕좌에 앉아있는 왕이 탐욕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분별력 있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해 살고 있는 한 우리 내면의 왕은 항상 탐욕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왕위의 결정권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 반란의 해답이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해 세속 왕에게 위임했던 왕위를 순수한 동기와 열정, 즉 동화에 넘겨주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직업 이상의, 순수한 가치를 위해서도 헌신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가치란 단순히 '내가 좋아서 하는 일'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도 다분히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일이 순수한 가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큰 희생까지 감내하는 숭고한 행위로만 그것을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시작도 전에 포기할지 모른다. 다행히 조금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반란군들의 존재가 눈에 띄는데 그들은 바로 아이들이다. 동심은 순수한 동기와 열정 외에는 왕위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세속 왕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관은 세속과 무관하다. 예수는 아이들을 가리켜 천국이 이런 사람들의 것이라 했고, 그들을 본받으라고까지 했다. 반면에 성인들은 '앞가림'이란 것을 해야 하기에 보편성을 놓을 수 없고 세속과 무관한 세계관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반란군이 될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순수를 잃고 더 이상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견딜 수 없어 '앞가림'에 치중하는 성인이 되었듯이 인간에게 동심은 영원하지 못하다.




  "어느 계층에 속하느냐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열린 마음만이 자네를 모든 사람 사이에서 동등하게 해 줄 걸세."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



  그렇다면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성인들에게 내면의 왕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경탄이라 믿는다. 삶의 경이로움을 들여다보는 것 말이다. 우리가 길을 걷고 있다면 여기 길이 있다는 것과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탄할 수 있으며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도 경탄할 수 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있다면 여기 음식이 있다는 것과 맛을 느낄 수 있음에 경탄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내 몸속에 들어가 육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는 것에 경탄할 수 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과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과 푸른 바다와 높은 하늘 같은 자연에 대해서도 경탄할 수 있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나 홀로 마시는 차 한 잔에서도 우리는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이가 드는 것, 실패하는 것, 이불킥을 부르는 부끄러운 일 등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들 속에서도 우리가 마음을 열고 경탄에 왕위를 내어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나'라는 존재 위에 단 한 번 경험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도 경탄할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러한 감정을 느낄 만큼 우리 자신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통과 슬픔 같은 감정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 아파할 수 있다. 때때로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나 우울함이 몰려올지라도 우리는 아직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에 경탄할 수 있다.  소년 네로와 성냥팔이 소녀가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경탄이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동화가 될 수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우리가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들을 돌이켜 봐도 그것이 다분히 경탄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탄이라는 순수한 동기와 열정을 그 자체로 대접하지 않은 것은 변해버린 나였다. 그러니 다시 왕위만 내어준다면 경탄하지 못할 인생은 없다. 움켜쥐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경탄한다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그것이 우리의 내면을 채우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연일 실업률은 치솟고 경기는 둔화되고 있다. 애써 얻은 일자리도 불안하며, 장사는 더 힘들다. 번지르르한 정치인들의 말속에서도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으며 대중들은 계속 마지못해 버티는 중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러나 상황과 별개로 우리는 경탄이 내는 목소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우리를 탐욕의 끝까지 데려가려 하는 자본주의의 얄팍한 안락의자 위에서 이 세계의 부유물로 남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반란이라 믿는다. 우리는 삶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알고 있다. 세상에 많은 이론들이 있어 설명에 부연설명을 더하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 삶의 경이로움을 지울 수는 없다. 경이로움의 왕좌가 삶을 지배한다면, 그리하여 경이로움의 통치가 우리가 사는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은 분명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대중과 지배계층 모두에 대한 얘기이다. 경탄이 없는 삶 속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비참함을 면할 수 없다. 세상은 누구에게도 완벽할 수 없고 그 누구의 뜻대로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의 사체는 결코 대중의 모습만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반란은 파괴가 아닌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는 데 목적이 있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 경탄 속에 피어나는 삶, 동화를 지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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