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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리 Oct 31. 2020

삶의 비참함 들여다보기

삶의 비참함 극복하기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는 어니스트라는 특이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멀리, 마을 밖으로 보이는 큰 바위 얼굴을 평생 쳐다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소설의 내용 또한 독특하다. 큰 바위 얼굴을 통해 겸허한 마음과 지혜를 배워가며 어니스트의 얼굴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을 가정해보면 어떨까. 한 자리에서 만 년을 보내며 인간의 삶을 관찰한 바위가 있다고 하자. 그 바위는 과연 인간의 삶을 무엇이라 평가할 것인가. 어니스트가 바위를 쳐다보며 느낀 감정처럼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반대일 듯하다. 큰 바위 얼굴이 보기에(굳이 평가하자면) 인간의 삶은 허무와 고독, 그것을 감싼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바위처럼 가만히 서서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바, 인생에는 우리가 들여다보기 싫은 비밀 한 가지가 숨어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참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유한함

  인생이 비참한 이유는 이 특징 하나로도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무형의, 무한한, 하나의 왕국이나 세계라고 할 만큼 오묘한 인간의 정신이 유한한 육체와 시공간 속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육체는 언제나 정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정신은 무한한 가능성의 청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육체는 한 번에 한 가지 가능성 밖에는 실현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 놓여 있다. 한계와 씨름하다 죽음이라는 가장 마지막 한계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앞에서 삶의 경탄할만한 속성을 얘기한 바 있지만 그것은 낙관주의와 무관하며, 삶의 유한함을 직시하지 않은 채 던지는 긍정론은 그 어떤 경우에도 무의미하다. 명망 높은 전도자가 된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통해 발견한 것도 허무와 고독, 그리고 인생이 지닌 필연적인 한계에 대한 통찰이 아니었을까.     


고통

  인생을 채우고 있는 것들 중 가장 현실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에겐 때때로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 주어지지만 행복과 즐거움은 선뜻 현재로 다가오지 않으며 그것을 느끼는 순간에도 내 것 같지 않을 때가 많다. 고통은 다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최상의 실존을 경험한다. 고통은 즐거움보다 현실적이다. 즐거운 순간은 잠시이며 그 기억마저도 차츰 희미해지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은 늘 현재로 다가오며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후유증을 동반한다. 과거를 회상하며 편히 산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흔히들 무용담, 성공담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그것과 동반된 고통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성공을 고통의 대가로 내세운다. 성공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고통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고통과 비례한 성공만이 호소력을 지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통이 동반되므로, 성공담 속에서도 삶의 비참한 성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림

  우리는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항상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상 고통의 유일한 해결책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기다림이란 것은 삶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으며 기다림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이 비참함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은 이 익숙한 일 자체가 비참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기다림이란 것은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그 대상이란 것은 일종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생에서 기다림을 빼고 남는 것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너무나 터무니없이 찰나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잠시뿐이며 이내 지나가 버리는 그 ‘순간’들이 어마어마한 부산물을 남긴다. 그것은 대부분 후회와 미련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히 고통스럽지 않은 기다림이라 해도 후회와 미련이 쌓여가는 중에 또 다른 기다림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은 삶을 눈 둘 데 없는 잡동사니로 만들어 버린다. 살면 살수록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기다림으로 뒤죽박죽 채워진 우리의 삶이란 것이 어찌 비참하지 않다 하겠는가.   


사회

  삶의 비참함에 대해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가난, 질병, 실패, 이별 등 정서적‧신체적 공격을 가하는 삶의 장애물들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사회를 통해 규정된다. 경제 시스템에 의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규정되고 ‘연구되고 알려진 바’에 의해 질병도 규정되며 그 시대가 허용하는 기준이나 감수성에 의해 성공과 실패도 규정된다. 개인 간의 관계 또한 다분히 사회적 역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사회는 무엇인가를 규정하며, 우리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 사회가 정한 기준을 거의 대부분 수용하며 산다. 문제는 꿈틀거리는 우리의 욕망이다. 욕망은 애당초 제동 장치가 없는 것으로서 우리가 속해 있는, 무한히 뻗어가는 이 우주와 성질을 같이 한다. 여기저기서 선을 넘고 뛰쳐나오는 과도한 욕망은 필시 다른 몇몇의 박탈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가진 것을 빼앗긴, 혹은 기회를 박탈당한 자로서 규정된다. 사회는 이러한 상황을 다시 사회의 일면으로 수용할 뿐 완벽하게 시비를 가려내진 않는다. 이것이 사회가 던져주는 또 다른 비참함이다. 자명한 이야기로, 비참한 인생들이 집합을 이루었다고 해서 비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비참함의 총량일 뿐이다.     


인생의 상승과 하강, 그 사이를 채우는 고단함

  물론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도 많다. 어떤 이들은 지금도 무엇인가 쟁취하고 있다. 높은 명성을 쌓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으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잃는 것이 인생이다.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를 얻고 모든 것을 잃는 경우도 있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서 주인공 제르베즈는 인생의 상승과 하강을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시작해 구트도르 거리의 주인공이 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삼켜버린 타락의 끝에서 가련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녀의 비극은 그녀가 선택한 일이라 할 수도 있지만 ‘상승’의 양면성은 인생의 종착지를 섣불리 단정할 수 없게 한다. 상승의 이면에 감춰진 고단함이란 것은 흡사 중력처럼 인생을 바닥으로 끌어당긴다.     




  “비자르 부인, 너무 일찍 오셨네요.” 제르베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오시라고 했잖아요……. 이 시간에 오면 세탁소 일에 방해가 되는데!”

  하지만 비자르 부인은 오늘 당장 담글 빨래가 없다며 우는소리를 했고, 제르베즈는 결국 빨랫감을 내주기로 했다. 두 여자는 에티엔이 자는 왼쪽 방에 쌓아둔 보따리를 양팔 가득 안고 나와서는 가게 구석의 바닥에 쌓아 올렸다. 추리는 데만 해도 삼십 분이 넘게 걸렸다. 제르베즈는 남자 셔츠, 여자 속옷, 손수건, 양말, 행주로 나눠놓으면서 뺑 둘러쌓아 나갔다. 새로 고객이 된 사람의 빨랫감이 보이면 알아보기 쉽게 빨간색 실로 십자 표시를 해 두었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더러운 빨랫감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동안 역겨운 악취가 퍼져나갔다.

  “세상에, 굉장하네!” 클레망스가 코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깨끗한 거라면 우리한테 왜 가져오겠어요?” 제르베즈가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냄새나는 게 당연해요……. 여자 속옷이 열네 벌이었죠, 비자르 부인?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제르베즈는 계속 큰 소리로 세어나갔다. 그녀는 쓰레기 더미 같은 더러운 천에 익숙해져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온갖 때가 묻어 누렇게 된 셔츠들, 설거지물의 기름이 굳어 딱딱해진 행주들, 땀에 절어 악취가 나는 양말들 사이로 장밋빛 맨살이 드러난 팔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산더미 같은 빨래 더미 위로 그렇게 몸을 굽히고 있는데, 알 수 없는 나른함이 몰려왔다. 둥근 간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오른쪽,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제르베즈의 모습은 마치 빨래의 악취에 취한 듯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눈빛이 흐릿해 보였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더러운 빨랫감들 때문에 주위의 공기가 악취에 젖어 있을 때, 제르베즈가 처음으로 게을러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목로주점」 중.


영화  [목로주점]


  끝없이 더러운 빨랫감들에 둘러싸여 허우적대는 것, 그것이 제르베즈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누구의 삶이 이와 다르지 않을까. 삶은 고단한 것이고, 고단함은 언제든 사람을 약해지게 만들거나 무너뜨릴 수 있다.      


허무와 고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가.

  우리 중 일부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름하여 ‘지혜’라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중 대다수가 지혜라 믿는 것은 일회성 ‘좋은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처세술’이라고도 한다. 그 정도로 만족해하는 이도 있겠지만 곧 그것이 진실한 해답은 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처세술만으로는 인간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허무와 고독의 대체재라 할 수 없다. 인생에 있어 비참함이 변하지 않는 성질인 만큼 진짜 지혜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 이며, 영원한 것이자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섣불리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발견되거나 경험되기 힘들다. 그래서 지혜를 찾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는 일이란 그것을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그것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는 것,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 부른다. 굳이 성경을 펼쳐보지 않더라도 삶의 비참함을 이겨내기 위해 우상을 섬긴다면 이에서 더 큰 비참함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뜩이나 짧은 인생을 의미 없는 행위와 주문들로 채워버리기 때문이다.     


자아: 우상의 공장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수렵, 채집 생활을 포기한 인류의 선택은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경작 활동은 획기적인 식량 증대를 가져왔지만 노동 시간 또한 몇 배로 늘어나게 했고, 식량공급의 증가로 인구 역시 증가하여 여분의 식량도 재빠르게 고갈되었다. 농사가 실패하면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이 사망률도 높아졌다. 절박한 생존환경은 분쟁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을 만들었다. 유발 하라리는 그럼에도 인류가 농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사피엔스」 중.

 

  그러나 그는 다음 장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 사실을 설명하며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의 발생에는 앞서 말한 물리적 조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생물학적 협력 본능이 부족함에도 수렵 채집기에 서로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의 신화 덕분이었다. …… 신화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이 형성될 가능성이 열리자,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꼭 필요한 사회적 결속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피엔스」 중.


  그는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다른 모든 인과관계를 초월하여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공통의 신화를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문명 발전사의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왜 그러한 동기가 존재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왜 상상력을 발휘하며 공통의 신화를 만들려고 하는가? 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말이다.

  비참함이 발생하는 곳은 자아이다. 자아는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끊임없이 생의 의미를 찾는다. 아마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비참함도 없을 것이다. 그저 기능적인 역할만 하다 가면 그만인 것이다. 허무와 고독, 고통과 고단함, 박탈감과 열등감 등은 바꿔 말하면 자아가 자신을 드러내려다 맞닥뜨리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그 장벽은 자아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상상력을 총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자아의 시작과 함께 존재하며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이 우울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사회적 결속이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한 문명이 도래한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문명 속에서 통용되는 상징과 신화들이 지니는 의미는 다름 아닌 허무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이 시대 사람들이 의지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겠다. 성경의 바벨탑 사건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사람들은 흩어짐을 면하려 하늘에 닿을 탑을 쌓자고 말한다. 탑으로 대변되는 공통의 신화가 필요한 이유는 한 가지다. 허무와 고독을 피해 그것에 의지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역사의 크고 복잡한 일들이 시작된 것은 자아가 우상의 공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아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해서 우상을 찍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득 찬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아 밖의 세계가 과연 의지할만한 대상이 되었는가?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것은 그저 비참함의 총량이 되었다. 그래서 자아는 자아 밖의 세계와 또다시 투쟁 관계가 되고 만다. 비참함을 피하려 할수록 우리가 비참한 존재라는 깨달음만 더해갈 뿐이다.      


공감: 지혜를 찾는 망원경

  나는 상상력의 기원에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우상을 찍어내는 것 같은 그 세계에 기원을 알 수 없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음악을 예로 들 수 있다. 음악에는 학문적으로 정립 가능한 질서가 있는데 그중에 화성학이란 ‘질서’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 질서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지는 단 하나의 이유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떤 화음이 조화로운 소리인지, 또는 어떤 소리가 불협화음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왜 조화롭게 느껴지는 음정끼리의 거리가 모두의 감각 속에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공감’이라 부를 뿐이다.

  도덕률도 이와 비슷하다. 법의 토대가 되는 윤리, 그 윤리의 토대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선악 개념에 대해 우리의 자아는 거의 같은 구조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재산이나 생명을 함부로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과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등의 명제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공감할 뿐이다. 혹자는 종교가 선악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제공하며 그것에 대한 합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선악 개념에 ‘왜’라는 질문을 없앤 것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의 불완전한 자유의지를 다듬고 제어하는 데 유용했지만 공감을 창조한 주체는 아니었다.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도 종교가 말하는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그것들을 긍정한다. 자아가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매일같이 그것을 품고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그 기원에 대해 잘 고민해보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공감이라는 것이 어렴풋하게나마 지혜를 찾는 망원경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혜가 존재한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은 한 가지 발견 하에서다. 상상력, 즉 허구를 존재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자아의 능력이 자연 발생하지 않았다는 발견, 다른 말로 하면 ‘자아는 창조되었다’는 믿음 하에서다. 별개로 존재하는, 이 보이지 않는 자아들의 세계에 공통된 질서가 존재하는 것, 그것은 자아가 무엇인가를 본떠 지음 받았다는 창조의 증거다. 지혜는 바로 이 창조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성경 - 시편 62:9]    



  성경은 공감이라는 망원경의 초점을 조금 더 명민하게 조절해주며, 비참하고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자아에게 유일한 희망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에 의한다면,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한 자아에게 있어 유일한 진실은 허무와 고독에서 오는 비참함이다. 자아실현은 입김보다 가벼운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창조를 인정하는 순간 한 가지 진실이 추가된다. 질서에 대한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진실은 모든 진실을 압도한다.          



창조: 질서를 부여하다     

  성경을 스무 번째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질서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성경 - 잠언 8:28-29]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무에서 유’로 향하는 존재의 부여이기도 하지만 ‘무경계에서 경계’로 향하는 질서의 부여이기도 하다. 목도하는 바와 같이 존재 이후는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와 육지가 나뉘는 것은 일종의 질서다. 빛이 어둠을 삼키는 것도 일종의 질서다. 생명체가 일정한 생존환경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 또한 질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시 생명체로서 나름의 생존환경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은 단순히 생명유지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밝혀줄 수 있는 대상 또한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일 수도 있고, 특정한 신념 혹은 사상일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제공하는 질서다. 질서는 ‘왜?’에 대한 일차적 해답이자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되어주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서를 몸에 두르려 하며 그 질서 안에서 안정감과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공통의 신화’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질서를 몸에 두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질서는 다분히 통제라는 이름을 띠고 있는데 개인에게는 억압과 고통을 주는 면도 있고, 그것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르면 다수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저항도 결국은 또 다른 질서를 향해 간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질서이며 인간은 질서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인생이 행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발 디딘 땅이 무너지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삼위일체: 다정한 초청장

  이렇게 우리는 공감 안에서 창조를 발견하고, 창조 안에서 질서를 발견한다. 사실 공감, 창조, 질서, 이 세 가지는 무엇이 먼저 발견된다고 할 수 없다. 질서 안에서 창조를 발견할 수도 있고 창조 안에서 공감을 발견할 수도 있다. 별개이자 하나인 관계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함을 전제하지만 창조, 질서, 공감을 통해 작게나마 이해될 수 있다. 성부는 창조를 통해 거대한 주권을 드러내며, 성자는 ‘하나님 나라’라는 질서를 선포하고, 성령은 그 주권과 나라에 공감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신이 일하는 방식’이며 그 일 안으로 인간을 초청하는 방식이다. 공감, 창조, 질서라는 삼위일체는 단순히 교회나 신학이 설계한 이론이 아닌, 인간이 비참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지혜의 초청장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최대한 다정하게 초청하는 방식이었다. 자아의 안과 밖 모든 세계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성경은 그 초청장을 모두에게 보냈으니 받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초청장이 다정한 이유는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는 것 외에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어쩌면 자아라는 말과 가장 비슷한 의미를 지녔다. ‘선택에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 내면에 도사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습성 전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에 대한 공격을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은 항상 자유를 위한 것이었고, 또 그것이 자아를 위한 것이었기에 때때로 승산 없는 싸움에도 투신하게 만들었다. 신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는 신도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초청에 자발적으로 응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신이 조금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인간은 신에게 등을 돌렸고, 신은 인간에게 초청장을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은 왜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까. 다 이해할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감정에 반응하는 존재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정이다. 사랑은 미워할 자유가 보장될 때 존재한다. 용서는 대적할 자유가 보장될 때 존재한다. 신은 그런 자유를 가진 존재였고, 그와 똑같은 자유를 인간에게 집어넣었다. 자유의 존재만이 그의 사랑에 같은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이 신의 자유를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그 자유로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품을 수 있게 되었고, 용서와 적개심을 동시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랑과 용서는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신성이다.   


다른 질서파괴

  그럼 증오와 적개심도 신성인가. 그러하다. 그리고 거기에도 신의 초청이 있다. 신은 우리가 같은 것을 증오하고, 같은 것을 대적하기를 원한다. 신이 증오하고 대적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신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든 ‘다른 질서’다. ‘다른 질서’란 무엇인가. 신에 대한 경쟁심과 교만이다. 높아지고 싶고, 신마저 이기고 싶은 마음가짐 말이다. 신은 자유를 주면서도 그 감정만큼은 덮어두려 노력했지만 인간은 결국 그것까지 들춰내고야 말았다. ‘다른 질서’를 따르는 자유까지 사용하고 만 것이다. 성경은 ‘다른 질서’를 따르기 시작한 인간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고 이야기한다(창세기 6:5).

  ‘다른 질서’는 인간에게 비참함과 허무를 더해주었고, 인간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 ‘또 다른 질서’를 추구했다. 자아가 느끼는 허무와 고독, 도처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들로 인한 비참함은 인간이 ‘다른 질서’를 추구한 결과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은 그 자유를 존중해오는 중이다. 그렇다고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창조, 질서, 공감의 삼위일체로 자신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인간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다른 질서’를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다시 공감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구의 절정에 예수가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적대감과 사랑이 동시에 드러난 사건이다. 그는 ‘다른 질서’에 대한 심판으로 죽었으며, 죽어야 할 대상 대신 죽음으로써 사랑을 보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질서’를 미워한다. 이 신성한 적개심은 자아의 안과 밖 모든 세계에서 그 질서가 파괴되길 소망한다.  


지혜: 들음에서 나는 믿음과 행동

  ‘다른 질서’를 파괴한다면 이제 어떤 질서를 따라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다. 그 질서는 예수를 통해 선포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들음으로 믿음을 얻는다. 이 믿음이 인류가 찾아 헤맨 지혜의 시작이며 이 지혜는 행동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 - 로마서 10:17]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성경 - 마태복음 11:19]    



  지혜는 ‘하나님 나라’ 질서를 의미하며 그것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과정은 간단하다. 그것에 공감하는 자들이 듣고, 믿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다. 무엇을 듣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무엇을 믿는가? 그것이 최선임을 믿는다. 어떻게 행하는가? 그대로 행한다. 물론 ‘다른 질서’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높일 것인가, 나를 높일 것인가’의 싸움이다. 그러나 지혜를 따르기로 뜻을 굳힌다면 그 삶에는 신의 가호와 인도가 있을 것이며, 자아의 비참함을 극복하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질서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지혜인만큼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에도 제한이 없다. 그 질서에 공감하는 자들은 모든 곳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때때로 구체적인 지시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지시는 구속과 억압이 아닌, 지금까지처럼 다정한 방식일 것이며 그것이 최선임을 믿고 행동한다면 그의 삶은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삶의 비참함을 들여다보자.

  비참함은 진실에 대한 목마름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 목마름은 지혜를 발견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한 비참함이란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절망’과 정확히 같은 뜻을 지니는 바, 그의 책에 나온 한 소절로 마무리하려 한다.     



결론적으로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이점이며, 그런데도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은 최악의 재난이자 불행이다. 아니, 그것은 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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