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의 역사는 초콜릿처럼 달콤하지 않다. 카카오 원두를 재배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딸린 수십억 달러 가치의 시장이 무색하게도 계속 가난에 시달려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조직된 제3세계의 카카오 농장들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노예제와 다름없는 착취를 통해 운영되었고, 여기에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코트디부아르 농장으로만 범위를 한정해도 아동노동착취와 인신매매 혐의가 추가된다. 상황을 반전시켜보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사태 해결은 아직 요원하다. 불과 몇 달 전 기사에서까지 코트디부아르 농장에서 노동착취를 당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고소 대상이 농장주가 아닌 허쉬, 네슬레, 카길, 몬델레스, 올람 같은 유명 초콜릿 제조 기업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노예제에 뿌리박은 초콜릿 시장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가늠하기 힘들만큼 복잡한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이 사태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이자 최후의 가해자로 지목될 만한 대상은 언제나 거대 기업들이었음을 암시한다. 초콜릿의 역사를 밀도 있게 추적하고 기술한 캐럴 오프의 「나쁜 초콜릿」에 따르면 초콜릿 사업은 주식회사나 다국적 재벌기업으로 성장하며 대형 독과점 및 카르텔 형태로 굳어졌다고 한다. 카카오 기업들 대부분은 집단 상부단체에 가입되어 있으며 “카카오 원두가 어디에서 오는지” 또는 “카카오 농민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따위의 골치 아픈 이슈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전문 대변인을 고용해 적당히 에두른 말로 시간을 끌 뿐이다. 달콤한 초콜릿 왕국의 이런 추악한 뒷모습을 마주하며 우리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근래들어 카카오 원두를 사고파는 험한 업무는 카길(Cargill)이나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 Company) 같은 거대 식품 재벌의 영역이 되었다. 업계의 필수과제, 특히 낮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저렴한 원두 공급처를 찾아 나서야 하는 부단하고 극심한 부담을 익명의 기업들이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낮은 가격을 정당하다고 여긴다. 자신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상품들이 다른 곳에서 불의를 조장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몇십 년간 카카오는 희생양을 계속 요구할 것이다.
캐럴 오프의 「나쁜 초콜릿」 中
이 '아차' 싶은 이야기 속에 우리의 분노를 유보해야 할 이유가 들어있다. 카카오 체인, 이 비정한 먹이사슬의 끝에 소비자라 불리는 이들, 다름아닌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기업의 흥망성쇠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언제나 소비자의 입맛과 기준이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우리라도 이 사태에 관하여 완전히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트 진열대에 걸린 초콜릿 가격이 적당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더 저렴해야 한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사실상 이 카르텔의 일부가 된 것이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이런 내막을 몰랐다. 좋다. 그렇다면 기꺼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의 돈을 지불하고 초콜릿을 구입할 의사가 있는가? 쉽지 않은 대답일 것이다. 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해도 소비자란 이름으로 수요를 창출해낸 만큼 우린 ‘착취 유발자’의 굴레를 벗을 수 없다. 군중 앞에 끌려 나온 다국적 기업들을 향해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보라”고 말한다면(그들이 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긴 하지만), 재작년 기준 GDP 순위 12위를 기록 중이며 곳곳에 다국적 기업들의 달콤한 상품들이 그득히 쌓여있는 이 으리번쩍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들 중 과연 누가 자신있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철퇴를 가한다해도 우리는 그들이 제공하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또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많은 부분에서 '악의 연대기를 끊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은 '달콤함을 포기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