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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안나 Aug 24. 2021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국제결혼 이야기4)

남편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이유


연애 시절 어느 날, 남편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국어 교재를 샀다면서 보여줬다. 


‘한국어 첫걸음’.


남편은 한국어를 전혀 못했다(지금도).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알아서 문제가 없었고, 굳이 남편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남편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으니 한국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공부를 할 거라며 뿌듯한 표정이었는데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면서 표정이 천천히 변해갔다. 

 ‘그런데 글자가 왜 이렇게 많아?’, '이거 다 외워야 돼?’, ‘아니, 무슨 모음이 스무 개가 넘어! 뭐가 이렇게 많아. 모음은 다섯 개밖에 없는 거라고’ (일본어의 단모음은 ‘아이우에오’ 다섯 개다.)

연달아서 이 무지막지하게(?) 많은 문자 체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데 저러러면 도대체 책은 왜 샀나 싶다. 첫날부터 좌절이다. 

그 후로 남편은 몇 번 내 앞에서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를 연습하면서 발음이 맞냐고 물어보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길은 없었다. 

문득 생각나서 찾아본 그때 남편이 샀던 책. 첫장 이후로는 공부를 안 했으니 아주 깨끗하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우리 사이였는데 남편이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나는 프러포즈를 받아들였고 내친김에 어서 결혼을 하자는 생각에 한 달 뒤 바로 한국으로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집에 도착해서 남편은 우리 부모님과 처음 대면을 했다. 거실에 마주 앉아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남편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남편 입에서 나온 것은 한국어였다.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평생 행복하게 하겠습니다.”


한국에 가기 전에 나는 긴장하고 있는 남편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결혼을 허락해달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혼할 거라고 말도 다 해놨고 뭐 하러 왔는지 아니까 따로 말 안 해도 된다고. 그런데 남편은 저 문장을 외워서 왔다. 어설픈 발음이지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어 교재를 샀던 그 시기(프러포즈 반년도 전), 남편은 나와 결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언제 프러포즈를 하고, 언제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갈지, 혼자 모든 일정을 세우고 있었고, 그때까지 한국어 회화를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본인 말로도 어학에 소질도 흥미도 없는 사람인지라 결국 문자 개수에서 좌절하고 말았던 것 같지만 남편의 야심 찬 결혼 계획은 성사되었다. 

프러포즈를 받기 전까지 우리는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가끔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한다. 

 “어쩜 그렇게 혼자 계획 세워놓고 모르는 척할 수가 있어?”

 “난 다 계획이 있었지.”


그래, 넌 다 계획이 있구나. 세부 목표는 미달성이어도 큰 목표는 계획대로 됐으니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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