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에게 좋은 사람입니까? / 고양이 꿈
우아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40대 중반의 여성, M의 이야기입니다. M은 대체로 성격이 온순해서 누구에게 큰소리 지르거나 싸워 본 적이 없습니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참고 넘기는 편이었죠. 그런데 최근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딸의 자기중심적이고 예의 없는 태도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엄마를 봐도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고, 엄마가 TV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시끄럽다며 자기가 더 성내며 소리 지른답니다. 게다가 해야 할 공부는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종일 하고 산다는 겁니다. M은 그런 딸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사춘기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또 어찌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들이고, 공부도 강제로 시킬 수 없는 일이라 여러 번 참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좋은 엄마로 살아온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던 것입니다. 그즈음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제목: 고양이를 때려죽이려고 한다.
옛날 살던 집 뒤쪽에서 갑자기 뭐가 튀어나와 놀라서 난 화가 난 거 같다. 그것이 새끼 고양이었나 보다. 작은 고양이를 잡아서 안 보이는 작은 포대 자루에 넣고 각목 같은 것으로 막 때려죽이려고 한다. 고양이의 머리가 짓이겨지는 느낌이다. 이제 죽었거니 여기고 앞마당에 묻으려고 삽을 찾는다. 어머니에게 삽 좀 찾아달라고 하니 빨리 못 알아들은 건지 바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포대 자루에서 꿈틀꿈틀 머리가 움직인다. 안 죽은 것 같다. 더는 어떻게 못 하겠고 그냥 빨리 묻어버려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꿈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거짓 없이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꿈에서 M은 새끼 고양이를 때려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꿈에서의 행동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일어나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무. 의. 식. 적!’ 말 그대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하는 M이 꿈에서는 왜 어린 고양이를 때려죽여야 했을까요? 고양이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꿈에 나오는 동물은 우리의 동물적인 속성들, 본능적인 요소이며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보통 고양이나 개가 나올 때, 고양이는 여성적인 동물적 속성을, 개는 남성적인 동물적 속성을 나타냅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직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에게 충직하고 진실한 특성을 지니고 있답니다.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신성한 동물로 ‘고양이 여신’이 있었는데, 개와 달리 고양이는 결코 자기 영혼을 주인에게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인이 자신을 좋아하더라도 자신은 주인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양이는 독립적인 측면을 상징합니다. 또한, 고양이는 창조적이고 다산적인 측면을 상징합니다.
꿈에서는 고양이를 죽이려고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것이 화가 난 것입니다. 새끼 고양이라는 창의적이며 독립적인 요소가 자신 안에 태어났지만, 보지도 않고 때려죽이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M은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꿈에서는 자신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때려죽이려는 충격적인 잔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잔인함에 대해 잘 보여주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습니다. 숲 속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잔인한 강도입니다. 손님이 오면 자기가 만든 침대에 잠을 재우는데 침대의 길이에 손님의 키를 맞춥니다. 침대보다 손님의 키가 크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다리가 짧으면 길게 잡아 늘여 죽이게 됩니다. 결국, 자기가 만든 침대와 맞지 않으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죽이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상대의 생각이나 의견을 어떻게든 자기의 틀(침대)에 맞추게 하는 강요적인 태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난 좋은 엄마야, 나 정도면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이지.’라는 이미지입니다. 잔인한 프로크루스테스도 나중엔 테세우스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타인에게만 틀에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틀에 맞추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엄마’라는 어떤 자신만의 틀을 갖고 있을 때, 자기 검열을 통해서 맞지 않으면 잘라버리고 부족하면 늘이며 맞춰가려 합니다. 그리고 이런 틀의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M은 중학생이 되어 무례해진 딸로 인해 힘들어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일어나는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정입니다. M이 힘들었던 것은, 딸의 행동에 대한 자기 생각(기준), 그리고 그에 따른 감정입니다. M은 ‘딸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자녀로서의 기준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순종적이어야 한다’,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다’라는 생각들입니다. 그런데 딸이 이런 생각(자신의 틀)에 맞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또한 M은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엄마로서 ‘엄마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기준도 있습니다.
'교양을 갖춘, 좋은 엄마여야 한다', '딸과 친구 같은 엄마여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M은 딸의 무례한 태도로 화가 나는데, 교양 있는 엄마이기에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여깁니다. M은 딸이 사춘기 이전까지는 자신과 사이도 좋았고, 아주 순종적인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로서 자타가 인정해주는 괜찮은 엄마였고, 딸과 지금까지 쌓아온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M은 딸과 자신에 대해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으로 덤불에 걸린 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아오고 있었습니다. M은 소리 지르고 화내는 ‘몰상식한 엄마’가(M의 표현)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꿈에서 새끼 고양이를 보고 놀란 M.
M이 최근 현실에서 무엇을 보고 놀란 걸까요?
딸이 어릴 때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착한 딸은 사라져 버리고,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딸의 방에서 사는 격입니다. 그런 딸을 보는 부모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사춘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입니다. 딸에게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내적 요인들이 요동치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아직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 관리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딸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줄 거라 여기는 엄마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건지 모릅니다. 이제 막 사춘기가 된 딸에게 새롭게 태어난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이죠. 자신이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신, 착한 딸은 죽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이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M 자신 또한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모습을요. 그러나 깜짝 놀란 M은 그런 딸을 때려죽이고 싶은 파괴적인 잔인성으로 결국, 자신을 때려죽이는 것으로 향한 것입니다. 이런 M의 잔인성은 슬프게도 자신과 딸에게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딸에게서 새롭게 태어난 새끼 고양이의 모습은, 딸을 통해서 동시에 M 자신에게도 새롭게 태어날 고양이의 모습입니다. M은 한 번도 자신의 주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 본 적 없었으니까요. 이런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을 딸과 함께 잘 키워내고 돌보게 된다면요, 그것은 딸과 자신이 주체적인 건강한 주인으로서 함께 성장할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면,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는 아주 잔인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좋은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알기 때문에 좋은 것을 남에게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누구에게 좋은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