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그러니까 20살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꽤 '정상적이고 단조로운 일상'과 달리 독특한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던 것 같다. 20대 초반이 그런 시기여서 그럴 수도 있다.
그 시기는 나도 딱히 매우 정상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기숙사 밖으로 나와서 수업이 모두 다 끝난 저녁에 학교 안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혼자 석식을 먹고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어떤 여자 애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몇 수업은 다른 과와 섞여 수업을 들었는데 서로의 존재를 알고, 가끔 인사도 하는 동기였다.
"어, oo이 아니야? 왜 울고 있어?"
"어 엉엉엉"
너무 서럽게 울고 있길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쨌든 그냥 갈 수는 없어 옆자리에 앉았다.
듣자 하니, 고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애한테 대학 가서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걔가 대학 가자마자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왜 졸업식 날에 안 했냐고 물어보니, 고등학생 티를 좀 벗고 꾸민 다음 하려고 했는데 그 새 여자친구가 바로 생겨버렸다고 했다. 나는 어쨌든 우리는 아직 신입생이기에, 아직 수많은 미팅들과 소개팅, 신입생환영회 등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들 기회는 매우 많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그때에도남 걱정해 줄 정도로 연애에 도가 튼 것은 아니었으나,그 애에게 다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여자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준 후, 진정이 되자 그 동기 여자애는 통학을 하는 애여서 바로 집으로 갔고, 나는 저녁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좀 더 한 후 기숙사로 올라갔다.
그 애랑은 그 학기 내내 수업을 같이 들으며 가까이서 마주칠 때면 인사를 했다. 그 이후로는 수업도 겹치지 않고, 그 애는 기숙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주친 적이 없었으며, 나는 그 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후 2년 정도가 지났고,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블로그를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생 때 스터디 플래너만 썼어서, 나의 일상을 좀 더 기록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 애를 만났다.
우선 블로그에 학교 이름이 있었고, 닉네임이 그 애 본명 그대로였으며, 사진까지 올라와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아마 학교 관련 검색을 하다가 그 애 블로그를 우연히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안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바엔 사랑하는 남자와 원나잇'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었다. 나는 그 당시 23살이었던 나는 순수했기에 신상정보를 다 드러내고 이런 글 제목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블로그, 그것도 제목에 떡하니 올릴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기다가 그 애 블로그는 학교이름을 검색하다가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블로그라고 생각했기에 어떤 생각을 가진 애인지 궁금했다. 한편으론 그 당당함과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검색비허용으로 해놓은 터라 이 글은 검색으로는 보이지않지만 그래도 다른 블로그 글로 유입되었을 때 사람들이 이 글을 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 터라 충격의 여파는 여전했다. (어쨌든 나는 그때 매우 순수한 유교걸이였으니까.)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애는 아직 사귀고 있고 내가 좋다는 애들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 낳기가 싫다. 성적 매력이 낮은 남녀가 살면서 겪는 고통을 자녀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딩크를 하겠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남성과 관계를 하는 것이 여성이 하는 섹스의 목적이라면 그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일명 몇몇 사람들이 비난하는 '먹버 당한 여자'가 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와 섹스를 하고 아이를 갖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그의 유전자의 반쪽을 얻는 것이고, 그의 정액은 내 안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아온 결과, 남자와 달리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는 건 어렵더라도, 섹스정도는 가능한 걸로 보인다. 거기다 책임까지 묻지 않는 여자라니. 남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여자가 없다.
그녀의 블로그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내용이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원나잇이란 모르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과의 의견차이로 연애까지는 가지 못했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군'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다 읽고 난 후 곧장 그 애와 2년 전 벤치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 읽었던 책의 여주인공이 떠올랐다.
다자이오사무의 사양에 나오는 가즈코.
사랑과 혁명이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던 그녀.
그녀와 가즈코의 가치관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는 거리를 두고 관조하며,자신의 욕망과 가치에 따라 산다는 점이.
그녀가 3년 전 벤치처럼 세상을 다 잃은 듯 울지 않을 수만 있다면,그녀가 글에서 말했던 방법으로 그때의 그 천둥 같던 울음을 그칠 수 있게 된다면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일은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할지는 각자의 몫인 것이다.
"그 녀석은 시골 귀족, 이쯤에서 타협할까?" "저도 이젠 시골 사람이에요. 밭일을 하거든요. 시골 가난뱅이."
"지금도 날 좋아하나?" 난폭한 말투였다.
"내 아이를 갖고 싶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기세로 그 사람의 얼굴이 다가왔고, 다짜고짜 나는 키스를 당했다. 성욕이 물씬 풍기는 키스였다. 나는 키스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굴욕적인, 분해서 흘리는 쓰디쓴 눈물이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넘쳐흘렀다. 다시 둘이서 나란히 걸으며, "낭패로군. 반했어." 그 사람은 말하고 나서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오므렸다. 어쩔 수 없어.
세상에 전쟁이니 평화니 무역이니 조합이니 정치니 하는 게 무엇 때문에 있는지, 이제야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테지요. 그러니까 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가르쳐 드릴게요.
여자가 좋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예요.
전,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나 책임에 대한 기대는 없었습니다. 저의 한결같은 사랑의 모험을 성취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바람이 완성된 지금, 이제 제 가슴은 숲 속의 늪처럼 고요합니다.
전,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비록 남편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낳는다 해도 마리아에게 빛나는 긍지가 있다면, 바로 성모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낡은 도덕을 태연히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만족이 있습니다.
술을 끊고 병을 고치고 오래오래 사셔서 훌륭한 일을 하시라는 따위의 그런 속 들여다보이는 빈말을, 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훌륭한 일'보다도, 목숨을 내놓고 소위 악덕 생활을 이어 나가는 편이 후세 사람들에게 도리어 감사 인사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잊어버린다 해도, 또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있다 해도, 나는 나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 건강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