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정이 일기를 적는 것은 날이 좋으면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처럼 당연한 일인 듯 했다. 그녀의 일상은 아무에게도(혹은 아무에게나) 공유되지 않는다. 운이 좋지 않다면 가까운 미래에 어느 네덜란드인의 손에 들어가 졸지에 전세계인에게 공개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은 분명히 아무런 손상없이 온전히 존재하고 있으나(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으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끝없는 반복에 의해 필연적으로 손상된다. 마치 어제 그녀가 갔던 카페 인간실격에서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연정과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여자(추석기차표 예매를 실패해서 이번 고향은 그냥 서울에 있겠다고 통화 하는 것을 들었다.)가 가고 다른 사람이 그녀 옆자리에 앉자 곧 앞의 그녀가 잊혀진 것 처럼. 바람막이를 걸친 가을이나 저체온증에 걸린 겨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녀가 이번 여름 만났던 12명의 사람들과 나눴던 아름다운 대화는 사막에 있는 별 수 없는 불쌍한 모래언덕처럼 손상되고 왜곡되다 결국 소멸될 뿐이다. 아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아무도 없는 9평 남짓 되는 방 안에서 그레텔처럼 키보드 위에 빵가루를 흘리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레텔과 그녀는 빵가루를 흘리는 장소가 어두운 숲 속 이냐, 태양이 작렬하고 있는 한 낮의 어느 사방이 밀폐된 방이냐 정도의 차이다. (그레텔이 그랬듯이 그녀가 그렇게 뿌려댄 빵가루들은 정확히 일주일 후 하드디스크의 문제로 소실 되었고, 20만원에 다시 복원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소연정은 치즈케익 한 조각을 먹은 후 4년 6개월 된 손에 익은 갤럭시 A90을 들어 여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카카오톡 알림이 뜬 것을 확인했다. 신유진이었다. 두 달 만에 온 답장이었기에 그 전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었나 잠시 떠올려보았다. 소연정은 그녀 또한 신유진을 두 달 정도 잊고 살다 답장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메세지를 확인하지 않고 카카오톡을 나간 후 전원 버튼을 짧게 눌러 화면을 껐다. 그 후 치즈케익을 포크로 한 번 더 자르고 입술 사이로 넣으며 맥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연정이 신유진에게 답장을 한 것은 날이 선선해질, 10월 즈음 화성 행궁 산책을 하다 문득 그녀가 생각이 났을 때였다. 도서관 상호대차 알림, 주식 배당금 알림, 인증번호 알림 등 각종 읽지 않은 알림메세지에 묻혀 그녀의 카톡방은 찾기 힘들었기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한 후 그녀와 대화한 방을 찾아 답장을 했다. 그 이후 연락은 순조로웠다. 소연정이 먼저 만남을 제안했고 신유진은 수락했다. 그러나 그녀와의 이 약속은 그 해 기상청조차 예상하지 못한 9년만의 초강력 태풍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번 여름에 갔던 워터밤도 일주일 전부터 비가 오기로 예정되어있었지만 그 날 비는 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행사장의 풍선처럼 풀이 죽어있다가도 벌떡 서고 이리 저리 휘둘리다가도 제 흥에 겨워 흥얼거리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게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2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