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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악 듣기

희로애락의 콤플렉시티, 샤콘느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by 서상원 Sangwon Suh
샤콘느는 내게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곡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의 보표(譜表) 위에, 한 악기를 위해, 그분은 가장 심오한 생각과 가장 강렬한 감정의 세계를 적었습니다.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샤콘느에 대해 쓴 것이다.

내가 이 샤콘느라는 곡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전기타반이라는 동아리에 처음 들어가 한참 정을 붙이고 있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동아리에는 남다른 음악성으로 존경받는 선배들이 몇 있었다. 낮에는 이 선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밤늦게 학생회관을 지나가다 동아리방을 들려 보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고뇌를 혼자 다 안고 있는 표정으로 쓸쓸히 기타를 치고 있는 전설 속의 선배를 한 명쯤 발견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어느 날 늦은 밤 텅 빈 학생회관 계단에 울리는 샤콘느를 처음 접했다. 그 이후로 샤콘느는 나의 음악감상 생활에 있어서 변함없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샤콘느란?

샤콘느(chaconne, ciacona)는 3/4 박자의 변주곡 형식으로 단순한 코드나 베이스 진행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변주가 특징이다. 이런 변주곡 형식은 소나타 형식이 자리를 잡기 이전 17-18세기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이 애용했는데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말고도 비탈리(Vitali)나 퍼셀 (Purcell) 등 다른 여러 바로크 작곡가들도 샤콘느를 남겼다.

JohanSebastian Bach (by Haussmann)

학자들은 바흐의 샤콘느가 1718-1720 무렵에 작곡되었다고 추측한다. 이때 바흐는 안할트-쾨텐(Anhalt-Köthen)의 왕자 레오폴트(Leopold)와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바라 바흐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난 직후 바흐는 후에 두 번째 아내가 될 17살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 빌케(Anna Magdalena Wilcke)를 만나는데 현존하는 샤콘느 악보의 원본은 필체로 보아 안나 막델레나가 받아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바흐 샤콘느의 구성

샤콘느와 같은 변주곡은 먼저 주제를 제시하고 제시한 주제를 여러 가지 스타일로 변형시켜 반복하는 형식이다. 샤콘느에서 바흐는 첫 네 마디를 주제로 제시하고 이를 64번에 걸쳐 변주한다. 처음에 제시되는 샤콘느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라단조로(d minor)로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베이스 진행:

이 베이스 진행은 이후에 나오는 256마디에 걸쳐 집요하게 반복 활용된다. 이 집요한 베이스 진행이 바흐가 이 곡에서 64번이나 쌓아 올리고 허물어 버리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의 기초라 할 수 있다. 그다음 5번째부터 8번째 마디는 약간의 변형만으로 다시 한번 주제를 반복해 주제를 각인시켜준다. 그다음 9번째 마디부터 본격적으로 변화무쌍하고 장대한 변주가 펼쳐진다. 중간에 장조로 바뀌었다가 긴 아르페지오(화음을 빠르게 순차적으로 연주하는 기법) 부분을 지나면 다시 단조로 돌아오고 카덴차(곡의 마무리 직전 화려한 기교의 독주)가 끝나면 다시 처음 제시한 주제를 상기시키며 곡은 막을 내린다.

전체적으로 샤콘느는 주제를 64번 변주한 것일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변주곡이라는 사실도 눈치채기 어렵다. 단순히 변주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잘 짜인 플롯에 따라 한편의 드라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샤콘느의 원본 악보

연주

바흐의 샤콘느는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고 잊혔다가 19세기 중반 재발견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샤콘느가 바이올린 독주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악보를 보면 바이올린을 연주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주제가 나온 악보에서 두 번째 마디를 보면 네 개의 음표를 같이 연주하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의 바이올린은 기타나 피아노처럼 서너 개의 음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다성(多聲, polyphonic) 악기가 아니다.

그래서 당시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부조니와 같은 작곡가들은 샤콘느를 다른 다성 악기로 편곡하거나 반주를 붙여 넣기도 했다(이 글 끝에 특기할 만한 편곡과 반주를 수록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첫 샤콘느 연주는 작곡된지 120년 만에 이루어진 페르디난트 다비트(Ferdinand David)의 1840년 연주였는데 그때도 멘델스존(Felix Mendelsohn)의 피아노 반주가 덧 붙여졌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나? 바흐 시대의 바이올린의 브리지(bridge)와 활(bow)의 디자인이 19세기 이후의 그것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흐 시대에는 브리지가 더 평평했고 활은 말 그대로 활처럼 휘어 있어 여러 음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고전시대를 지나면서 동그란 브리지와 일자 활이 보편화되어 다성 연주가 힘들어진 것이다.

현대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샤콘느의 다성 동시연주의 문제를 보통 아르페지에이션(빠르게 여러 현을 순차적으로 연주하는 기법)을 통해 해결한다. 예를 들어 아래 Annex I 두 번째에 나온 헨릭 쉐링(Henryk Szeryng)의 첫음 연주를 들어보자. 마치 동시에 세음을 연주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가 하면 Annex I 다섯 번째에 올라온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의 첫음은 베이스인 낮은 '레'를 먼저 연주해 강조하고 나서 나머지 두 음을 동시에 연주한다. 같은 아르페지에이션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다.


악보의 편집과 해석

요즘 연주되고 있는 샤콘느 악보는 페르디난트 다비트 이후 여러 연주자와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고 해석된 것이다. 이제까지 50본이 넘는 샤콘느 연주용 악보가 출판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연주용 악보가 있는 이유중 하나가 아르페지오(arpeggio) 부분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바흐의 샤콘느엔 유난히 긴 아르페지오 부분이 있는데 원본 악보에서는 이를 맨 앞 두 박자분의 음표만 제대로 표시하고 나머지는 정확히 어떻게 연주하라는 표시 없이 화음만 적어 놓았다 (아래 그림은 원본 악보의 아르페지오 부분 시작점). 아마도 악보를 받아쓰던 안나 막달레나가 음표를 일일이 그리기 귀찮았나 보다. 그래서 아프페지오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하는 부분에서 이본(異本) 간 크고 작은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샤콘느 악보 원본 89번째 마디위에 "아르페지오"(arpeggio) 라고 쓰여있다.

레코딩

Annex I에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샤콘느 레코딩 중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들을 모아봤다.

나는 정경화 씨의 1974년 앨범에 수록된 샤콘느를 제일 좋아한다. 이 앨범에서 정경화 씨는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 전곡을 연주했다. 정경화 씨가 1970년 이착 펄만(Itzhak Perlman) 대신 갑자기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 무대에 서게 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데카' 레코딩에 섭외된지 4년 만에 나온 초기 앨범이다. 녹음 당시 20대였던 정경화 씨의 연주는 열정과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너무나 섬세한 연주가 특징이다. 이 앨범의 아르페지오 부분은 특히 눈부시게 화려하다.


정경화 씨의 1974년 앨범 표지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 <바로크 레코드>에서 1992년 무렵 이 LP 앨범을 구입해 지금까지 듣고 있다. 혹시나 해서 iTunes Store와 인터넷을 찾아 봤지만 아쉽게도 이 앨범은 더 이상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 정경화 씨가 2014년 12월 다시 런던 무대에 설 때 홍보용으로 만든 짧은 샤콘느 클립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짧은 클립이지만 정경화 씨 특유의 강렬함과 섬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https://www.youtube.com/watch?v=DEVLtf6J-g4


감상

샤콘느를 감상할 때는 다른 일을 하면서 배경음악으로 듣는 것보다는 감상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단일 악장 치고는 연주시간이 긴 편이라 그만큼 방해 받지 않는 시간을 마련해 둬야 제대로 샤콘느를 감상할 수 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아르페지에이션을 이용한 바이올린의 다성 연주가 처음엔 귀에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빠른 아르페지에이션으로 다성 악기에 가까운 연주를 하는 헨릭 쉐링의 연주를 들어본다거나 아니면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Annex II, #8), 에로이카 트리오의 피아노 트리오(Annex II, #7) 연주로 샤콘느 감상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음악은 사실 듣는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느낌이네 저런 느낌이네 하고 정형화시켜놓고 보면 듣는 사람이 느껴야 할 감정의 자유를 뺐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래서 감상에 대한 얘기는 별로 안 했다. 모두들 직접 경험해 보시라. 아직 샤콘느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음악 감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Annex I: 역사적으로 중요한 샤콘느 연주 몇 가지

1.Arthur Grumiaux https://www.youtube.com/watch?v=iqpo--lu8yQ


2.Henryk Szeryng https://www.youtube.com/watch?v=1ZGrCrR8CJw


3.Joseph Gzigeti https://www.youtube.com/watch?v=DJoCUv9Q5YQ


4.Itzhak Perlman https://www.youtube.com/watch?v=KpYUaRg0aDw


5.Jascha Heifetz https://www.youtube.com/watch?v=6q-Zqz7mNjQ


6.Yehudi Menuhin https://www.youtube.com/watch?v=BApAF0DwSW8


Annex II: 특기할 만한 편곡과 반주

1.With Felix Mendelsohn’s piano accompaniment

https://www.youtube.com/watch?v=-JkaJC78_ww


2.With Robert Schumann’s piano accompaniment https://www.youtube.com/watch?v=Ip0h_mF_dWY


3.Transcription for the left hand piano by Johannes Brahms

https://www.youtube.com/watch?v=91KBiPlit-Y


4a.Ferruccio Busoni’s arrangement for piano played by Busoni (part 1 and 2)

https://www.youtube.com/watch?v=MyABEniTRSw


4b.Ferruccio Busoni’s arrangement for piano played by Busoni (part 2 and 2)

https://www.youtube.com/watch?v=8SXzYPjd9wQ


5.Leopold Stokowski’s arrangement for orchestra conducted by Stokowski

https://www.youtube.com/watch?v=NEUYq5t-cCM


6.Henri Messerer’s arrangement for organ

https://www.youtube.com/watch?v=ofnm01lkEUk


7.Anne Dudley’s arrangement for piano trio

https://www.youtube.com/watch?v=2l5QVkibUoI


8.Andrés Segovia’s arrangement for classical guitar played by Segovia

https://www.youtube.com/watch?v=zcGt9AFlI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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