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단 Apr 20. 2020

공짜 보험

삶의 가치

 "액정 앞뒷면 교체 비용은 20만 7천 원입니다. 구매 시기가 2017년 7월이시니까 계산기 한 번 두드려 보시고 결정하셔야 할 것 같네요. 핸드폰 분실 파손 보험 들어 두신 건 있으신가요?"


 1000일 동안 동거 동락한 걘역시에잇이 사고를 당했다. 장염에 걸려 온 몸에 힘이 빠진 상태에서 핸드폰을 꺼내다 그만 놓쳐버렸다. 그것도 에스컬레이터 난간에서. 내려가는 디딤판에 막 몸을 실었던 터라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걘역시는 2미터를 자유낙하 한 뒤 대리석 바닥과 '완전쎄게충돌' 하였다. 급하게 내려가 사태를 확인하였을 때는 이미 전면 액정 대부분이 모래 조각처럼 부서져 있었다. 왜 진작 보험을 들어두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해외 여행자 보험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가입했는데 왜 이런 사고에 대해선 미리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일까.


 보험은 기본적으로 발생 가능한 여러 유형의 경제적, 신체적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암 보험 가입률은 40% 정도라 한다. 기대 수명까지 생존 시 암 발생 확률은 약 36%이므로 보험에 있어 발생 빈도와 가입률은 양의 상관관계에 있는 것 같다. 발생 빈도와 함께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인은 손실 금액이다. 질병, 재해나 기타 사고를 통해 발생하는 손해, 손실이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라면 이 또한 보험을 통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다수가 재화를 모으고 사고를 당한 개인이 이를 사용해 손실을 보전한다는 점에서 보험은 가입자들이 위험 부담을 공유하여 개인에게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상은 되나 발생이 불확실한 손실을 대비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선 보험회사 역시 금전적 이익이라는 현실 가치를 추구하지만 보험이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착한 제도다.


 여기 우리 삶에서 5% 확률로 발생 가능 한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보험도 있다. 이 보험의 특장점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입 조건도 없다. 남녀노소 지병 유무 갱신·비갱신 등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원하면 누구나 언제든 가입할 수 있다. 상품 이름은 0420 삶의 가치. 보장 내역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전체 인구 대비 약 5%  2,585,876 명. 대한민국에서 지체, 시각, 청각 등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018년 통계청 전국 등록장애인 수 참조)


 나는 대학 시절 장애학생인권위원회(이하 장인위)라는 학내 기구를 통해 처음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예산안 심의, 감사 등을 위한 '전체 학생대표자회의'를  주관한 적이 있는데 참여자가 400명이 넘다 보니 장소부터 도시락, 비품 등 신경 쓸게 많았다. 회의 준비로 분주하던 어느 날 학생회실로 낯선 얼굴들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휠체어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장인위 소속이라 소개하며 회의 장소로 공지된 건물이 언덕 꼭대기에 있어 신체장애가 있는 몇몇 학우들이 접근하기 힘들 것 같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말문이 막혔다. 부끄러웠다. 나는 장애인이 전학대회에 참여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내 반응이 낯설지 않은 듯 차분하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장인위 자문을 받아 부랴부랴 제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회의실부터 다시 구했다. 휠체어 접근성을 위한 리프트 및 경사로 등을 점검했다. 수어 가능자를 찾지 못해 청각 장애인 학생들이 회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스크린을 설치하고 실시간으로 모든 대화를 타이핑하도록 했다. 시각 장애 학생들을 위해 모든 대의원들에게 발언 중 지시대명사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평소엔 총학생회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야당(?) 대의원들도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배려만큼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이 경험은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했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턱을 오를 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할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보도블록을 걸을 때.  그간 아무 불편함 없이 이용했던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됐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뿐 아니라 발달 장애 등을 가진이들 에게도 관심은 번져 갔다.

 

 지능, 신체적 차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인간적 실존의 동일성과 비교하면 턱 없이 작다.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우리는 인정받고 매력적이고 싶으며 사랑하고 욕망하며 행복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과연 이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교육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건강하게 욕망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OECD 주요국 GDP 대비 장애인 복지 공적 지출 현황을 보면 한국은 0.36% 정도로 전체 평균의 1/4 수준이다. 이번 21대 총선에선 내가 속한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 중 선거 공보물에서 '장애인'이 들어가 있는 후보는 2명밖에 없었다. 갈 길이 멀다. 시스템만 변해서도 안된다. 장애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구체적 삶이 변하기 위해선 법과 규범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식의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그들의 삶에 애정 어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다시 보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현명한 당신은 생에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실비 보험, 암 보험, 여행자 보험 등을 가입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 중 5%는 장애인이다. 그리고 이 중 88%는 후천적 원인으로 장애를 갖게 된 이들이다. 즉 국민 100명 중 4.4명이 살아가면서 장애를 얻는다. 이 확률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과 사고를 대비했듯 이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돈은 필요 없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따듯하게 대하는 것. 그들에게 잠시 우리 손과 발, 의지를 빌려 주는 것. 일주일 604,800 초 중 단 몇십 초 만이라도 그들을 알아가려 노력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따듯한 관심은 혹시 내또는 내 주변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는 일에 대한 우리 모두의 보험이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5분 자유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