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반말하는 사이가 되기를
지난주 사내 메신저를 뜨겁게 달궜던 사건이다. 이 일 직후 잠시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갈 때도 마스크를 벗지 말라는 지도편달이 떨어졌다. 대표이사의 소심한 복수랄까. 대다수 동료들이 이 배짱 좋은 신입사원을 염려하며 부회장을 힐난했다. 사실 회사 내 반말이 뜨거운 감자가 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내 신입사원 교육을 담당했던 과장님을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과장님은 조금 까탈스런 면은 있지만 확고한 교육 철학과 강단을 가진 분이셨다. 하지만 요 몇 년 간 신입사원들로부터 '반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강사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기분 나쁘다' 등의 피드백을 받은 이후 의욕을 잃고 교육자가 아닌 관리자로서 일한다며 푸념을 늘어놨다.
말을 놓는 것이 선배의 당연한 권리라고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개인적 관심이나 유대감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이들에게도 일방적으로 하대하기 쉽다. 그냥 반말을 넘어 '기분 나쁘게 반말'하게 되는 것이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73%가 직정 내 괴롭힘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이 중 폭언 및 비속어와 함께 수치심을 주는 발언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직장 내 갑질이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만약 나이와 직급에 관계없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한다면 존칭이 유지해 주는 무형의 거리가 사적 영역으로 끊임없이 난입하는 무례한 언어들로부터 어느 정도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유독 말의 높낮이에 민감하다. 근의 공식은 모르더라도 나이, 출생연도, 기수 등이 만들어내는 관계 공식만큼은 사회생활 필수템이다. 어느 모임이든 첫 만남부터 상하관계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족보(?)가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각자가 사용할 말의 높낮이와 호칭이 결정되고 이는 서열을 강화하고 되새긴다. 이렇다 보니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어떻게든 상대방 나이를 알아 내 위아래를 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가끔은 이름보다 나이를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나이를 확인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와 같은 고전부터 십이간지를 활용하는 토테미즘 방식, 학번이나 군번, 공적 마스크 사는 날 등을 이용한 통계적 접근 등이 활용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호칭과 존비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몇 년 전 여동생이 결혼하면서부터다. 나와 2살 터울인 동생은 2살 연상 남자 친구와 결혼했다. 매제는 동생과 결혼했단 이유만으로 나를 형도 아닌 형님이라고 부를 아찔한 처지에 놓였다. 나는 동갑내기가 아내 오빠란 이유만으로 내게 형님이라 불러야 한다는 게 너무 거북스러웠다. 매제 역시 형님이란 호칭은 도저히 입 밖으로 안 나오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하며 지내기엔 내면 깊이 뿌리내린 내 전통적 가족관이 흔들리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호 존대하는 사이 2년이 흘렀다. 인습의 벽을 깨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면서도 종종 '나는 동생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같은 유난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대화에 사용되는 언어와 그들의 관계는 서로 순환적으로 맞물린다. 그러나 언어와 호칭은 도구일 뿐 결국 본질은 두 사람의 관계다. 상호 존대와 진심으로 서로 존중하는 것이 다르듯 반말을 쓰는 것이 늘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하대하거나 무시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관심을 갖고 다가가려는 마음은 존댓말보다는 오히려 반말에 가까운 속성 같기도 하다. 생면부지 상대방에게 대뜸 반말하는 것은 두 사람이 어떤 관계든 바람직하진 않다. 하지만 첫마디에 그들을 꼰대로 규정하고 마음의 문을 닫으면 대화의 본질은 흐려지고 관계는 정체된다. 세상을 자신의 반사경으로만 보며 타인의 눈에 투영된 세상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꼰대스러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