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리 없는데 이상하게 가벼운 몸, 차창 밖으로 들리는 새소리와 커튼 사이로 드리우는 따스한 햇살. 주중이라면 책상에 커피를 쏟은 것 마냥 잠이 달아날 상황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일. 요. 일 이니까~~! 갓 건조기에서 나온 듯 고실고실한 이불을 껴안고 보드라운 탄성을 느끼며 침대를 뒹굴면 지구만 한 행복도 순간에 있다는 말이 허언증이 아님을 깨닫는다. 시계는 어느덧 9시 30분.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 일요일 아침 가장 확실한 선택, 동물 농장을 봐야 하니까. 이불 걷어차고 좀비처럼 걸어 TV 앞 소파에 앉는다. 일주일쯤 옥살이를 한 몰골이지만 아무렴 어때. 안 씻은 게 죄는 아니잖아.
"드디어 일요일이다!"
주중에 유독 어려운 분석이 많아서였는지 T는 주말만 기다린 눈치다.
"오늘 우리 할 일 있잖아. 결혼 건 매듭 지어야지" J가 말했다.
"아니 일어나자마자 일 얘기부터 해야겠어? 주인장 지금 동물농장 본다고 얼마나 신나 있는데. 점심 먹고 커피 한잔 하면 그때 하자"
J를 말리는 건 늘 P다.
"아냐.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일 거리가 많을수록 오전에 해야 좋다고."
S가 J 편을 든다.
"그래. 사실 계속 미뤄왔던 일이기도 하잖아. 이 안건 다루기엔 동물 농장이 서프라이즈 보단 낫기도 하고"
"뭐야, 너까지 이러기야? 다들 그렇다면 뭐 까짓 거 지금 하지 뭐. 자 누구부터 말할래?"
F까지 가세하자 P는 언제 반대했냐는 듯 빠른 태 새전 환으로 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누가 랜선의 즐거움이 인스턴트라 하였나! 오늘도 기꺼이 couch potato가 돼 동물 농장을 찾았다. 선착장에 버려진 강아지 깜이와 환경 미화원 아저씨의 동화 같은 인연이 전파를 탄다. 귀여운 깜이와 아저씨의 따스함이 내 마음 깊은 곳을 잔잔히 울린다. 아저씨는 결국 깜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주말마다 도로 한 복판에서 망부석이 돼 아저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깜이 영상을 보고 나서다. 정말 다행이다. 깜이를 아무리 아끼더라도 입양하여 함께 살아가기로 한 결정은 또 다른 거니까.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건 애정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다붓하게 앉아 깜이를 비다듬는 아저씨와 집 안에서 한결 편해 보이는 깜이를 보다 문뜩 결혼에 생각이 닿았다.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생활이 순탄하다는 보장은 없어."
T가 포문을 열었다.
"그럼 사랑 말고 어떤 게 더 필요할까?"
F는 T 발언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먼저 되묻기로 했다.
"결혼은 일종의 거래야. 나는 상대방 집안, 직업, 소득, 외모 전부다 계산기 두드리며 따져봐야 한다고 봐. 예고편이 전부인 영화가 얼마나 많아?"
T는 늘 그랬듯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리 있지만 현실성이 없어. 예쁘고 착하고 배경 좋은 사람이 우리 주인장을 좋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
N이 일침을 날렸다.
"내가 언제 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고 했냐. 그런 측면들도 감안해야 한단 거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에 괴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어. 결혼이라고 다르겠어. 나도 T랑 비슷한 의견이야. 결혼이 거래와 비슷한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단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바통을 넘겨받은 J가 말했다.
"너희들 의견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난 대화와 헌신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 함께하는 순간이 지루하고 불안하다고 상상해봐.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해."
F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반박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번엔 J가 되물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자녀, 섹스, 양가 가족 등 결혼생활에 수반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로맨틱하지 않다거나 남사스럽다고 피하면 안 되고."
S가 거들었다.
"맞아. 개인으로서 원하는 것 그리고 부부가 함께 원하는 것들을 애매하게 얼버무리지 말고 정직하고 속속들이 털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대화가 잘되는 사람이야.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결정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겠어."
F말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N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희들 말을 들어 보니 '대화'라고 말한 부분은 두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원칙에 대한 부분처럼 느껴져. 그럼 비슷한 취미나 유머 코드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서로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조하며 분위기가 훈훈 해지려는 찰나, I와 E가 갑자기 회의에 난입했다.
"잠깐잠깐! 우리도 껴줘! 이런 중요한 회의를 우리 빼고 하기냐."
"아이야이야, 너네 오늘 쉬는 줄 알았더니. 지금 배우자를 정하는 데 있어 대화가 잘 통하는 게 중요하단 얘길 하는 중이었어."
J가 능숙하게 두 사람 자리를 마련하고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
"총론 동의, 각론 신중. 나는 헌신은 반대야."
E가 회의록을 훑어보다 헌신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말했다.
"헌신은 자유의 반대말이 아니야."
N이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E는 속으로 뜨끔 했지만 태연한 척 계속 이어갔다.
"헌신은 결심한다고 생기게 아냐. 강요와 책임감으로 행해져선 안 될 가치라고."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줘."
오래간만에 아군을 만난 T가 왠지 통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려면 서로 언행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깊은 신뢰가 생겨야 해. 부부는 산수 계산에 능하지 않아야 한다고, 일일이 더하고 빼면 안 된다는 말도 웃겨.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공을 들인 만큼 결과를 기대하기 마련 아니야? 가까운 사이 일 수록 작은 것도 확실히 하고 투자한 만큼 결과를 보이려 노력해야 한다고 봐."
"그러니까 헌신하는 모습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결과이지 조건이 돼서는 안 된다 이거지?"
"역시 N이 이해가 빠르다니까."
E는 N 발언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얘들아, 아무래도 논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아."
회의록을 몇 번이나 검토하던 I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나머지는 당황했다.
"결혼상대로 어떤 사람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한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니잖아. 내 생각엔 오늘 논의됐던 그런 면을 지닌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 주인장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쪽이 맞는 방향 같아." "쟤는 꼭 조용히 있다가 정곡을 찌르더라" F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I 의견에 동의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P가 회의록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결혼 건은 이 정도로 해서 주인장에게 넘기자. 다음 안건은 고양이야."
*출연진
T (사고) , F (감정), J (판단), P (인식), S (감각), N (직관), E (외향), I (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