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그리고 결혼을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 러시아 속담-
결혼 후 한 달이 흘렀다. 반년 전부터 그녀와 함께 살았던 터라 내 일상이 결혼을 기점으로 변한 건 없다. 그날을 달라진 건 결혼식 주인공이었던 우리 관계가 아니라 양가 부모님이 사위와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판단하셨는지 '집안', '예의', '어른'과 같은 왠지 모를 책임과 부담이 느껴지는 단어들이 자주 오르내렸다. 중학교 이후 엄마와 갈등 한 번 없던 나는, 결혼 직후 며느리를 가족 단톡 방에 초대하자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며 큰 실망감을 안겨드렸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지만.
양보와 배려라는 자원은 결혼 생활에 최소한으로 쓰여야 한다. 우리 에너지는 한정적이라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회사 생활만으로 거의 대부분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에너지를 채우지 못하고 되려 더 소모해야 한 다면, 그러한 관계가 장기적으로 잘 동작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내가 결혼 전 가장 많이 신경 썼던 부분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배려와 양보로도 서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 나와 근본적으로 비슷 한 사람. 다행히 난 그런 사람과 결혼했고 둘 사이의 작은 문제들은 많은 자원을 쏟아붓지 않아도 술술 해결됐다. 결국 에너지가 들어가는 건, 가족문제이다.
부부의 첫 갈등은 명불 허전 '명절'이었다. 논 한 마지기 없이 맨 땅에서 시작 해 다섯 아들을 키운 할머니는 아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한 세기에 걸쳐 지켜온 전통을 고수하신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만 같은 명절 풍경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며느리들에겐 썩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명절마다 여행을 다녔던 그녀에게는 더더욱. 그러니 추석에 할머니 집으로 내려와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차례도 같이 지냈으면 하는 부모님의 바람은 문자 그대로 전달하기엔 어렵고 두려운 요구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 시간이 편하진 않겠지만 그래 봤자 1년에 2-3일이면 1%도 안 되는 거잖아. 그 정도 시간 투자해서 어른들 서운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
그녀의 대답은 놀랄 정도로 계산적이고 또한 합리적이었다. 나는 그 대답이 좋았다. 어떤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로 접근하는 것. 모든 관계는 결국 서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서 일궈나가는 것이니까. 결혼이라고 해서 뭐 다를까. 아니 오히려 결혼이야 말로 어찌 보면 가장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제도일지도. 쿨 했던 그녀와 달리,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 강서방. 나는 지금 목포로 벌초하러 왔어. 내년엔 는 강서방도 같이 와야지~"
장인어른께 받았던 전화다. 사실 당시만 해도 당연히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라 생각했다. 선산 벌초 한 번 해보 적 없는 내가 남쪽 땅 끝 어디쯤 있는 처가댁 조상님들 벌초를 하러 가야 한다니. 동의 한 적 없는 의무를 다하라는 요구에 늘 강력하게 저항했던 나지만, 이 경우는 달리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떨결에 예예 그래야죠 하고 대답했다.
결혼 전 많은 생각과 결심을 했지만, 아직 무장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내게 지워진 의무와 책임의 무게를 덜어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합리화시켜줄 논리들. 한 편으로는 두 사람 관계에 집중 한 나머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에 소홀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문제를 사랑과 헌신에 기대어 풀어갈 생각은 없다. 그것들은 긴 시간 함께 삶에 덖이고 숙성돼야 비로소 우러난다. 대신,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만족시킬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어떤 관계든, 윈윈 전략은 있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