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1
책장에서 금전출납부처럼 투박하게 생긴 노트를 발견했다. 까만색 인조가죽으로 된 촌스러운 덮개부터 구미를 당긴다. 후루룩 빠르게 속지를 넘기자 참깨 같은 글씨가 종잇장 틈틈이 박혀있었다. “엄마! 이거 아빠가 엄마한테 쓴 일기장이네?” 나는 현관문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와 잔망스러운 발걸음으로 안방을 향해 달려갔다. “아서라. 그때 그 남자 사라진 지 오래됐어~” 얼굴에 일기장을 들이밀기도 전에 엄마는 양 팔을 공중을 향해 휘저으면서 눈을 감는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아빠의 연애 일기장을 엄마 코앞까지 들이민다.
그놈의 일기장에 속아서 둘 도 없는 사랑 꾼인 줄 알고 결혼했단 엄마는 내게 으름장을 놓는다. “좋은 말로 할 때 읽지 말라고 했다?”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시절의 아빠가 엄마에게 쓴 주옥같은 문장들을 계속 읽어 내려간다. “방금 전까지 봤는데 또 보고 싶다. 하루빨리 너와 살고 싶어.” 아빠 일기장을 들고 신나게 거실을 누비는 나와 그만 읽으라며 뒤를 쫓는 엄마가 거실을 가득 메운다.
우리 엄마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가출했다. 평생 아내에게 기대어 돈 한 푼 안 벌던 아버지가 자신의 엄마를 때리는 모습을 더는 보기 싫었다고 말했다. 4남매 중 막내딸이라고 오일장에서 빨간 구두 한 켤레를 사줬던 아버지일지라도 매 맞는 엄마를 공포에 떨며 지켜보던 상처가 컸을 터였다. 엄마는 스무 살 꽃띠에 깨 털던 작대기로 죽어라 아내를 때리던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 그 길로 오빠랑 (지금 나의 아빠) 살림을 차린 것이다. 천호동 인형공장에서 만난 그 오빠와 아이를 셋이나 낳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엄마는 이따금씩 아빠와의 결혼을 후회했다. 지금이야 둘도 없는 짝꿍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의 엄마 아빠는 죽자 살자고 싸웠다. 초등학생 때였나. 한 번은 친구들과 한 잔 걸치느라 툭하면 외박을 일삼던 아빠에게 엄마가 슬슬 시동을 건 적이 있었다. “혼자서만 아주 살만 나지? 이럴 걸 내가 왜 집을 나와 가지고!” 빨간 망토를 흔드는 엄마 투우사에 잔뜩 약이 오른 성난 아빠 소가 냅다 들이받으려고 다가온다. 그러자 부리나케 화장실로 도망가서 문을 똑 잠가버린 엄마의 한마디. “해볼 테면 해봐.” 그러자 성난 소가 망치같이 뭉툭한 손으로 쿵쾅쿵쾅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런 식이면 문을 부수는 수가 있어?”
그 시절 남자랑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다던 순진한 엄마였다. 평생 무뚝뚝한 아빠 때문에 살면서 서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빠는 세상 어떤 남자보다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다. 곰살맞은 부분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시댁 식구들이 엄마를 조금이라도 흉을 볼라치면 단번에 엄마 편을 드는 아빠였다. “이 사람 가진 것 하나 없는 저한테 시집와서 시아버지 병시중 든 사람입니다.” 이 말 한마디면 오리주둥이를 하던 시댁 식구들이 말을 꾹 삼켰다는 엄마의 증언에 아빠에 대한 고마움이 깃들었다.
혼수라곤 첫째 딸인 나 하나에 밥 수저도 없이 시집온 엄마를 일평생 고마워하는 아빠만큼 사랑꾼이 또 있을까. 연애시절 속닥이던 달콤한 말은 가출을 하고 살림을 차리는 순간 사라졌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게 뭘 대수냐면서 아빠 덕에 지금껏 살아왔다며 눈물을 훔치는 엄마를 보면 사랑이 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다듬어지지 않은 청춘들은 부딪치고 깨지길 수없이 반복했다. 각자가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음울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마음이 가난하게 자란 탓이었을 것이다. 받은 사랑이 없어서 줄 사랑마저 없던 청춘 남녀는 서로 사랑을 내놓으라며 줄기차게 싸우며 살았지만 이젠 서로가 둘 도 없는 인생의 동반자다. 엄마의 가출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마다 엄마의 짧은 소감문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 추신 : "근데 엄마 스무 살 아니고, 스물한 살에 가출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