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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Aug 11. 2021

엄마는 누가 위로해줘?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3

  엄마는 꼭 아쉬울 때만 날 찾는 기분이었다. 이십 대의 난 엄마의 고민을 발로 뻥 걷어차듯 얄밉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어른들끼리 해결해" 라든지. "됐어, 나 그만 듣고 싶어." 하며 방문을 쌩하니 닫아버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지만 엄마는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내 마음이 애 같아서 그런 건지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엄마와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지만 그때만 해도 동생들과 차별당하며 자랐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도 같다.


  어릴 땐 똑같은 짓을 해도 나는 매를 맞고 동생들은 으레 그럴 수 있는 일로 넘어갔었다. 청소년 시기 땐 새벽에 일어나 다리미판에 교복을 척척 다려 입던 나와 달리 엄마는 꼼꼼하지 못한 여동생의 성격을 탓하며 여동생의 교복만 손수 다려줬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기도 전에 동생을 마중 나가기도 했다. 근데 꼭 시댁 이야기라든가 집안의 중요한 결정 같은 것 혹은 친척 간에 얽히고설킨 중대사는 내가 들었다. “왜 나만 이런 이야기를 들어?”라고 받아치면 엄마는 늘 “동생들은 아직 애잖아.”라고 응수했다.


  나도 아직 어린데 왜 자꾸 어른 취급을 하는 건지. 아직은 어리고 여린 내가 어른들의 무게감을 나눠 듣는 것까진 괜찮았다. 그렇지만 가끔 의견을 낼라치면 어린 게 어른들 일에 훈수 두는 거 아니라며 괜히 욕을 먹기도 했었다. 좋은 소리도 못 듣고 고마움도 얻지 못하는 장녀의 무게감은 정말이지 별로였다.  내리사랑으로 엄마의 사랑을 양보하며 자란 것도 억울한데 집 안의 무게감은 내 몫이 되는 건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이다음에 결혼은 막내아들이랑 하고 다음 생엔 막내딸로 태어나리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어느 날이었다. 외갓집 감나무에 감이 알맞게 익어갈 무렵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학병원에서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며 인근의 요양병원으로 옮기길 권유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휴가를 내고 외할아버지가 있는 곳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엄마를 포함한 4남매의 동의를 얻은 의료진은 외할아버지의 인공호흡기를 천천히 뗐다. 띠 – 띠 - "14시 25분, 사망하셨습니다." 수분이 쪽 빠진 할아버지의 몸은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사람들처럼 이미 쪼그라들어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엄마의 언니인 이모 덕분에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틈만 나면 “아이고 아버지요. 아이고 세상에~” 땅을 치며 오열을 하다가 의식을 잃는 이모를 부축하느라 모든 식구들이 애를 먹었다. 엄마는 그런 자신의 언니를 보다 못해 조용히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팔을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언니만 슬퍼? 아버지 살아계실 때 더 잘하지 못해 우는 거라면 감정 좀 삼켜!” 여리디 여린 이모는 엄마의 다그침도 귀에 들리지 않는지 계속 울다가 의식을 잃었고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나는 홍어무침이나 육개장을 손님상에 나르다가 멀리서 그런 엄마를 바라봤다. 이미 뿌리가 썩을 대로 썩은 고목나무가 여전히 땅에 심지가 굳게 박힌 척 안간힘을 다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삼일장을 치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갔고, 엄마와 나는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노곤한 몸을 실었다. 어둑한 창밖을 내다보는 엄마의 옆모습에 까맣게 그림자가 졌는데 그런 엄마의 그림자를 허공에 가만히 매만지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엄마는 왜 이모처럼 펑펑 안 울었어?”

  “네 외할머니 더 슬플까 봐.”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늦은 밤 현관문을 열면 엄마는 베란다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할아버지 집 감나무에서 따온 덜 익은 감을 만지작거렸다. 진작 홍시가 되어야 할 감이 어딘가 설익었는지 개중 가장 단단해서 따왔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이모 얘기로 운을 뗐다. “이모는 갱년 긴가 봐. 그러지 않고서 장례식장에서 계속 기절하면서도 오열하는 게 평소 같지 않잖아.”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너희 이모는 한이 많아 그래. 그 시절에 집이 하도 어려워서 맏딸이라고 초등학교만 나와서 그래. 뿌리가 약해서 시집가 힘든 얘기는 줄곧 너희 외할머니한테 하잖아. 고생이 많아 그래.”


  나는 엄마 말을 묵묵히 듣다가 궁금해졌다. 그럼 엄마는 누구한테 고민을 말하지? 엄마는 외할머니한테도 진짜 힘든 얘기는 안 하고 살았다고 했었다. 첫째 딸인 이모가 몸이 자주 아프고 고된 시집살이 한탄을 외할머니한테 하고 사니깐 엄마는 외할머니한테 힘든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면서 말이다. 새삼 흔들의자 뒤로 길게 드리워진 엄마의 그림자가 지쳐 보였다. 그럼 엄마는 도대체 누가 위로해주는 걸까. 엄마는 위로받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막내딸이라도 엄마는 맏딸 못지않게 외할머니를 지키며 살아낸 걸 보니 막내가 꼭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

 

  “엄마, 많이 외로웠겠다.”

  “그러니깐 네가 엄마 말 좀 들어줘.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하겠니.”     


  엄마는 꼭 아쉬울 때만 큰딸을 찾으며 힘든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어색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털어놓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나마 털어놓는 게 큰딸이었던 거다. 겨우 힘든 얘기를 털어놓았는데 큰 딸이 쌩하니 외면할 땐 더 사무치게 외로웠을 생각을 하니깐 콧등이 시큰해진다. 툭하면 엄마, 엄마 하며 엄마를 부려먹는 내가 아쉬우면 더 아쉬운 입장인데 말이다.


  “엄마,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엄마가 외할아버지 돌아가시니깐 이제야 그런다면서 치사한 딸내미란다. 환하게 웃으면서. 엄마는 평생 내가 위로해주며 살아야지. 그동안 살면서 엄마에게 위로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 쉬운 일이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마다 엄마의 짧은 소감문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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