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유 Sep 08. 2021

동네 뒷산도 엄마 마음은 견주지 못하지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8

  하늘이 높아졌다. 덥다고 방정맞은 손부채질에 엉덩이를 들썩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새 가을이다. 세상에 날씨만큼 변덕인 것도 드물지 싶다. 밤엔 제법 스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9월. 엄마는 산에 오르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카메라 렌즈에는 도무지 담기지 않는 오묘한 가을빛을 눈동자로 쓰다듬으며 “봐라. 낙엽색이 이렇게 영롱할 일이니?", “비슬아. 이게 다홍빛도 아니고 감색도 아니고 뭐라니? 꼭 루주 색 같다.” 매년 가을마다 똑같은 감탄사를 처음인 것처럼 내뱉던 엄마. 그런 엄마의 모습은 아오리 사과처럼 풋풋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엄마와 등산을 자주 다닌 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고 내가 서울살이에 지쳐 모든 걸 정리하고 부모님 댁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부터였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그때 나는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때꾼한 게 다 죽어가던 낯빛이었다나. 내가 서울에서 쓰던 짐을 다 끌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왔던 이삿날. 이부자리를 곱게 펴지도 못한 채 쓰러지듯 눕던 내 팔을 엄마는 바짝 일으켜 세웠다.  “먹어라. 먹어야지.” 그리고는 쟁반에 고사리를 넣고 직접 푹 끓인 빨간 육개장 한 그릇을 이불 위에 툭 올려놓았었다.


  꼬박 석 달은 방바닥에 붙은 시체처럼 지냈다. 해가 중천에 떠야 겨우 눈을 비볐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억지로 입에 꾸역꾸역 넘기고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 못 자고 죽은 귀신이 붙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그런 나를 엄마는 채근하지도 않고 그저 삼시 세끼 밥을 차려줬었다. 이불 밖으로 나올 기운도 없던 날엔 작은 밥상에 쌀밥과 갓 구운 삼겹살을 잘게 잘라서 이불 앞까지 대령해주던 엄마. 모든 의욕을 잃은 딸자식 수발드는 게 짠하다가도 몇 달이고 지속되면 부아가 치밀 만도 한데 엄마는 묵묵히 밥상을 차려낼 뿐이었다.




  그때도 선선한 바람결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가을이었고 하늘이 높고 예뻤다. 엄마는 여전히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새끼 고양이처럼 잠만 자던 나를 쓱 쳐다보고는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인 나라~ 해가 똥구멍에 뜨겠다.” 오랜만에 햇살을 느껴보던 탓에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비비는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어느새 행거에 걸려있던 야상 재킷에 모자를 아무렇게나 눌러쓰고는 전철역 앞 시티투어 버스정류장에서 엄마와 나란히 서 있었다. “나오기 싫다니깐~ 이게 뭐야?” 서울도 아닌 경기도 어느 지역에 오후 1시 출발행 시티투어버스는 동네 아주머니들만 바글거렸기 때문이다.


  버스엔 나름대로 시에서 운영하는 시티투어라고 가이드도 있었지만 나는 관광버스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버스에 몸을 싣자 어느새 대부도 해솔길에 다다랐다. “자~ 여기서부턴 방파제 위에서 바다 구경도 하시고, 해솔길 따라서 얕은 산행도 하시면 됩니다. 3시까지 버스 앞으로 모일게요!”  


  엄마는 입이 댓 발 나와 심통이 가득한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손목을 더 세게 이끌고 방파제 가까이 내려갔다. 철썩대는 바닷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듯했지만 나는 영 기분이 나질 않아서 계속 툴툴거리던 참이었다. 그러자 파도가 방파제를 세게 치고 들어와서 내 양말이 흠뻑 젖었는데 엄마는 본인의 양말을 벗어 내 발에 신겨 주었다. 엄마와 난 굽이굽이 해솔길을 따라 가볍게 산을 올랐다. 나는 그때 몇 달을 주로 누워서만 지냈던 터라 얕은 오르막에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쌕쌕 숨을 몰아쉬며 엄마 손에 붙들려서 계속 산을 오르던 참이었는데 앞장서던 엄마가 돌연히 멈추어 섰다. “우리 딸 어렸을 때 참 예뻤다? 엄마가 그때 널 많이 끌어안아줬으면 딸이 이렇게 세상살이가 힘들진 않았을 텐데…….” 하며 손깍지를 꽉 쥐더니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라며 고백 타임을 가졌다. 난데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엄마의 고백에 나는 왠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머쓱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고 엄마와 함께 산을 올라갈 뿐이었다.




  그 해 가을이 가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초라했던 한겨울. 엄마는 이번엔 동네 뒷산엘 가자고 했다. 해발 450M 정도 되는 산이었지만 산행에 익숙지 않던 내겐 제법 높다고 생각되던 때였다. 나는 이렇게 속절없이 계절이 바뀌어 가는데도 다시 취업할 엄두가 나질 않아서 집에서 팽팽 놀고 있을 때였다. 엄마 등산화를 빌려 신고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동네 뒷산에 갔던 날. 야트막한 동네 뒷산도 산이라고 등산객이 몰려있는 산 입구를 따라 등산복 가게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뜩이나 세상살이에 치여서 만신창이라 체력이 지하 오십층까지는 내려간 기분인데 이럴 때 산행이라니. 산을 올라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정상에 이르기 직전에 별안간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애꿎은 엄마한테 “내가 오기 싫다고 했잖아! 왜 끌고 나와서는 이렇게 날 힘들게 해? 응?” 하며 퍼붓고 말았다. 딸이라는 게 세상 엄마 편이어도 세상살이에 힘들면 또 이렇게 엄마 탓을 하는 간사한 종족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언제나 딸 편인지라 그런 나를 기어코 정상까지 끌고 올라가더니 태연하게 돗자리를 폈다. 


  엄마는 말없이 배가 빵빵한 등산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종이컵에 믹스 커피 한 잔을 내게 건넸다. 연이어 플라스틱 통 뚜껑을 잽싸게 열어서는 집에서부터 썰어온 오이와 당근을 말없이 내밀었다. 나는 기어이 정상까지 올라온 산행이 힘들어서인지 그냥 사는 게 서러워서인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 몇 방울 흘리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져서일까. 나는 엄마가 건넨 오이를 오도독 씹어 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덧 부지런히 하산하다 보니 다시 산 입구에 다다랐다. 엄마는 이번에도 내 팔목을 잡아끌고는 “비슬아. 등산복 하나 사줄까?” 하며 어느 등산복 가게로 들어갔는데 나는 한겨울에도 꽃분홍색에 진달래색까지 휘황찬란한 등산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해서 골라보라는 엄마의 채근에  “안 사. 안 산다고 했잖아!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해? 산도 오기 싫었어. 짜증나 정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등산복 가게에서 눈물을 올칵 쏟아냈다. 돌이켜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던 때라 툭하면 눈물이 나곤 했던 것 같다.


  복병이 등산복 가게에 숨어있을 줄은 차마 몰랐었는데. 어디선가 날 선 목소리가 쨍그랑하고 날아왔다. “이년아. 느그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어지간히 좀 해라. 이 싹수없는 것아!” 등산복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다짜고짜 훌쩍이던 내게 욕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엄마가 휘청대는 나를 본인의 등 뒤로 끌어당기고는 “모르시면서 함부로 욕하지 마셔요.” 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등산복 가게 주인은 껌을 짝짝 씹으면서 “여보세요. 아주머니. 다 큰 딸 교육 그렇게 시키지 마요. 싹수없는 것들은 콱 그냥 욕먹어야 정신 차리지!” 나는 마치 길 가는 행인한테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었는데 엄마는 손에 들고 있던 등산복을 행거에 탁 내려놓고는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우리 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느새 나는 다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등산복 가게를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하고 있었다. 내 팔을 끌며 앞장서던 엄마가 계속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도 작게 얘기하기에 무어라 말하는지 몰랐는데 잘 들어보니 엄마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는 다 이해할 수 있어. 어미는 원래 그런 거야. 자기 자식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심지어 어미 욕을 하고 다닌다 해도 어미는 자식 편이지. 암, 당연하지. 그렇지.…….”




  그날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다음에 자식을 낳아서 내 자식에게 내가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았을 때 우리 엄마처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글쎄. 나는 우리 엄마처럼 천사같이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그 등산복 가게 주인아주머니처럼 욕 한 바가지를 퍼부어줄 수도 있겠다 싶으니 말이다. 


  엄마 마음은 동네 뒷산 따위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우직하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면 동네 뒷산은 상대도 안 된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 산맥 정도는 되어야 엄마가 자식을 지키는 굳건한 마음이랑 견줘지는 걸까. 인생이라는 쓴 공격에 완패한 마음으로 쓰러졌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아무렇게나 팽하고 굴려도 오뚝오뚝 일어서는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게 밑을 무겁게 떠받치고 있는 사람. 엄마.


 나는 그 후로 몇 해에 걸쳐 엄마와 바뀌는 계절 따라 자주 산을 올랐다. 이젠 사이좋게 서로를 챙겨가며 산을 오르지만 작년에 엄마가 아픈 후로는 아직 산행은 무리다. 가을이면 귓가에 들리는 "야야 비슬아. 이 낙엽 색깔 좀 봐라. 이렇게 곱다니?"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운 날이다. 재작년 설악산에서 찍었던 사진을 엄마한테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한 겨울에도 털장갑 끼고 등산복을 단단히 여미고 산에 가는 사람이 우리 엄마니깐 다시 함께 산에 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보는 밤이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에는 엄마의 짧은 소감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