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실망했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건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때는 열여덟의 여름 무렵. 친구가 임신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들 다섯 명이서 자주 어울려 지냈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 뒷담을 넘어 떡볶이를 먹기도 했고 주말이면 대학생들이 가는 카페에 가서 웨이퍼나 막대과자가 올라간 프라페를 주문했다.
끼리끼리 통하는 사이에도 덜 친하고 더 친하고의 간극이 분명 존재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 나와 가장 덜 가까운 친구가 임신을 한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건 임신한 친구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친구들에게서였다. 특히 임신한 친구와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가 가장 크게 분노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실망이야.” 그 친구는 실망했다는 말로도 마음에 차지 않는지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계속 쓸어내렸다. 나머지 친구들도 더럽다, 저질, 실망이야 하고 내뱉었는데 그중에서도 ‘실망’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들렸다.
실망.
실망이라는 단어가 자꾸 내 귓가에 맴돌았다.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임신했다는 것. 혹은 임신한 친구가 이혼 가정에서 부모 없이 자퇴한 두 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것. 아니면 늦은 밤 가끔 집에 들르던 친구의 엄마가 진한 립스틱을 바르고 짧은 원피스 차림으로 술에 취한 채 들어온다는 사실. 그것도 아니라면 학교 기악부였던 그 친구가 외부강사로 초빙된 마흔 살의 음악 선생의 여자 친구가 되어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것이었을까.
왜 말이 없냐는 세 친구들의 의아한 눈망울에도 나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잘 모르겠어. 마음이 좋지 않아.” 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내게 어느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날 뿐이다. “너는 늘 그러더라? 맨날 관심 없는 척. 지 혼자 우주선 타고 하늘 날고 있나 봐.” 내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버스나 전철을 타는 사람이지 우주선을 타는 외계 생물도 아니었다. 어지간해서 이해가지 않는 것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지 못할 뿐이었다. 나의 대쪽 같은 성정이 답답할지언정 죄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열여덟에 임신한 그 친구는 학교에서 자퇴를 권유받았다. 낙태를 했고 인근 야간고등학교에서 수업 일수를 채워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다섯 명 중 가장 친하지 않았던 그 친구가 자퇴를 하고나서부터 부쩍 친하게 지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동네 어귀의 작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을 가자고 했는데 그날 이후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고아원엘 다녔다. 시설 아이들의 숙제를 봐줬고 함께 간식을 먹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지나서였을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너는 왜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한참을 떠올려도 무엇을 너에게 실망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하자 친구는 쭈쭈바를 쪽 빨면서 그네를 탔다. "나는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내 죄가 씻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아원에 다녀."
살면서 인생의 돌부리에 발을 찧어 아픈 건 나 자신이었다. 보는 이가 너 참 아프겠다 할지언정 그 아픔이 타인에게 온전히 느껴지진 않는다. 그 아픔은 온전히 나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에 제일 유감인 것도 나 자신이다.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마다 남들이 넌 이렇게 될지 정말 몰랐어? 라며 쉽게들 말하지만 폭풍이 올 걸 알고도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길가에 서 있는 멍청이는 없을 거다. 그러니깐 내 인생에 가장 유감인 건 당신이 아니라 언제나 나다.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실망하는 사람도 당신이 아니라 나다.
나는 어지간해서 실망했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엄연히 말하면 쓰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다. 내가 당신에게 실망했다고 말할 만큼 당신을 정말 믿어줬는지 스스로 반문하게 되니깐. 그리고 함부로 당신의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큼 실망했다는 말이 주는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내가 실망했다는 말을 쓰지 않는 건 단지 당신을 헤아리는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실망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픈 말인지 아는 것뿐이다.
언젠가 그 친구가 아이를 셋 낳고 산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이후론 들은 바가 없다. 우리가 만약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혹은 스무 살의 그 친구와 인적이 드문 놀이터의 그네를 탔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실망하지 않았어. 너도 스스로에게 너무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 너도 유감이었을 거니깐 그저 너 자신을 위로해주길 바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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