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전봇대 아래에서 담배를 물려던 윤희는 행인이 지나가자 동물적으로 몸을 돌린다. 행인의 눈길을 한 번 받은 후, 땅바닥을 뚝뚝 치면서 윤희는 다시 담배를 꺼내 문다. 여자 친구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윤희(영화 '윤희에게' 에 나오는 윤희)의 삶을 응축한 단 하나의 장면.
타인의 발자욱 소리에 등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여야 했던 윤희, 사랑, 담배
그녀가 내 방문을 두드린 건, 오랜 전, 아주 오래된 오스만투르크의 옛집에서였다. 아주 오래된, 안내문에 몇 백 년 전 건물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어 외형에서만 '옛집' 냄새가 나는 그런 호텔에 방을 잡고, 저녁 내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그 숙소 사장님의 어머니와 역시나 말 한 마디 알아들을 수 없는 텔레비전을 같이 보면서 콩 비슷한 작물의 껍질을 벗겼다. 손등에 주름이 쪼글쪼글 잡힌 할머니가 호텔 로비 역할을 하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고,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그 손짓을 따라 가선 콩 비슷한 작물의 껍질을 벗기다가, 여행 중에 익힌 간단한 인삿말을 하고 내 방으로 들어온 밤.
샤프란 볼루, 18년 전 그곳은 관광지라기보다 시간이 멈춘 시골마을 같았다. 미루나무가 우거진 잡목 숲 초입에는 베틀을 놓고 실을 짜는 여인들과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여행자에게 한없이 친절했다. 낮에 동네 한바퀴 돌면서 마주친 수줍은 여자아이들과 골목에 앉아 차도 마시고, 조그마한 쇼핑가를 걷고, 가지 요리로 배를 채우고 숙소에 돌아와 콩 비슷한 작물의 껍질을 까도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무도 없었다.
똑! 똑
방문 손잡이 고리를 똑똑 쳤다.
저 아시겠어요?
네? 네. 아침에......
들어오세요.
하필이면 2002년 여름.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란 것을 탔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첫 비행의 여정은 인천을 출발하여 싱가폴에서 24시간을 대기한 후, 아테네로 들어가는 험난한 코스였다. 행운과 사람들의 선함이 전지구적으로 전염되어 나가던 운 좋을 때를 만나, 가난하고 어수룩하고, 영어도 못하는, 아시아의 20대 중반의 여자가 무사히 미코노스와 산토리니를 거쳐 밤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반짝반짝 햇살이 눈분신 쿠사다시로 들어가는 낭만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나게 고마운 선의와 기막힌 행운들이 겹치면서 한 달 후, 나는 제 앞가림 정도는 간신히 할 수 있는 여행자가 되어 새벽 안개와 함께 고색창연한 옛도시, 샤프란 볼루에 빨간 배낭을 메고 내렸다.
그 새벽 안개 속에 그녀도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 조카 둘과 동행 중이었다. 중년의 여성이 배낭을 메고선 지쳐 있어도 생기를 숨길 수 없는 젊은 조카를 이끌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녀의 조카보다 겨우 세네 살 정도 많은 어린 여자아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 밤, 나를 찾아왔을 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그 인근의 숙소 몇 곳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작은 동네여서 한국에서 혼자 온 젊은 여자가 묶은 호텔을 찾기는 쉬웠다고.
담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같이 담배를 피자고 했다.
그녀가 나눠 준 담배를 함께 폈다.
그녀는 한국에서 방문 학습지 교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오래 오래,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나에게 혼자 여행을 오래 다닐 생각이면, 담배를 챙겨두라는 팁과 함께 함부로 방문을 열어주거나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지침도 알려주었다. 보기보다 겁이 많으며, 술은 원래 마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녀는 혼자 다니는 여행이니까 그래도 기억해두라고 했다.
담배 몇 대를 나눠 피고 그녀는 돌아갔다. 그녀 일행의 숙소가 어딘지, 샤프란 볼루를 언제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샤프란 볼루를 떠나 나일강을 따라 내려가던 그 밤열차 안에서도 한숨도 자지 않고, 그녀가 알려 준 몇 가지 팁을 되씹고 되씹었다. 결혼했냐고 하면 했다고 하라, 절대 술이나 음료는 받아 마시지 마라, 넋을 놓으면 안된다, 동물적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고, 위급시 연락할 곳을 챙겨두어라..... 그래도 여행은 할 가치가 있으니 돌아가면 최대한 돈을 모아라, 그래도 나는 이 한 개비의 담배와 여행지의 밤이 있어 행복하다,
조카에게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아침에 잠깐 스쳐지난 나에게 주고 간 그녀.
난 그녀가 준 말들을 오래 오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