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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May 01. 2020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4월 29일, 둘째 아이의 생일이자, 내가 두 번째 출산을 한 날이다.

아이의 생일이라고 작은 소반 위에 조그마한 케이크를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내가 너를 낳느라 고생했듯, 너 역시 내 몸을 비집고 나오느라 수고했다고,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차게 너를 사랑한다고, 이제는 네가 없던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조그맣고 보드라운 너를 안고 있으면 오로지 너와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이런 고백이 막 터져나오려는데,

큰 아이가 텔리비전을 켰다. 이천 물류공장 화재 소식이 나왔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2011년과 2014년 두 차례 출산을 경험했다. 두 번 모두 예정일보다 2-3주 이른 시기에 유도분만을 통해 출산을 했다.  첫 아이 때는 전치태반과 양수과소증이 심해서 동네 병원에서 대학 병원에서 출산하기를 권유했다.  유도분만 전날까지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다음날 서울대학병원에서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분만 촉진 약물을 투입한 후, 간헐적인 통증을 겪다가 다음날 새벽에 동물처럼 덜렁 들려서 환한 불이 나를 발가벗겨 놓는 분만대에 고기짝처럼 놓여, 예닐곱의 흰 가운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데에서 홀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아이를 낳았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수치, 나를 발가벗겨 놓고 한 마리 동물처럼 울부짓게 하는 고통, 지독한 외로움, 산산히 부서져가는 그 이전의 '나들'. 탯줄을 자르고 잔여물까지 쑤욱 빠진 뒤에서야 이 모든 것이 끝났음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모성, 그런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곱고 예쁘게 출산을 하고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어머니, 그런 모성은 이미 이데올로기화된 것일 뿐, 내가 경험한 두 번의 출산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명화된 사회 한가운데서 나의 동물성을 철저히 몸으로 인지하는 그 시간들은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그래, 인간은 동물이야, 그렇게 쉽게 말하기에는 너무 철저한 인지여서, 한 동안 무척 괴롭고 외로웠다. 출산은 그 잘난 인간도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마에 앉은 파리,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 존재론에 끌어 안아야만  처절한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이라고 잘 난 것도 없는데, 그 안에서 또 다시 잘난 인간 못난 인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우리가 얼마나 평등한지를, 고통은 내 몸을 지나가면서 그렇게 흔적을 남겨놓았다.


2011년 1월, 산후조리원에서는 생매장 당하려 끌려가는 소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꺼억꺼억 소리내어 울면서 내가 소가 되었다. 소와 내가 다를 게 무엇이냐, 내가 출산을 하지 않았더라면 관심가지지 않았을 그 소들의 울음소리가 여태 내 몸을 돌고 있다.  2014년 4월에도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그 배를 쳐다보며 그저 울기만 했다. 또 다시 아이의 생일날에 또 다른 이들이 불에 타들어가는 소식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아이를 낳는다는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나의 동물성을 고통 속에서 처절히 인지하는 것,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위치를 좀 더 넓은 관계 망에 놓아두는 것, 그리하여 좀 더 내 감각이 넓어지는 것. 소의 울음소리, 가라앉는 배와 가라앉은 수 만 개의 삶들, 수 천 억 개의 삶들, 수 조 개의 삶들, 불 속에 잊혀져간 사람들을 오래 추모하는 것, 그리고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더 움직이는 것. 민가협 어머님들과 세월호의 어머님들이 손을 맞잡고 이천으로, 제주도로 어디든 일하는 아이들의 죽음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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