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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미석 Jan 13. 2017

오 나의 시칠리아, 그리고 팔레르모 2.

시칠리아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영화 '대부'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을 거다. MBC '주말의 명화'시간이었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백 편의 영화' 특집으로 매주 엄청난 영화가 15인치의 화면을 뚫고 나올듯한 존재감을 뽐냈다. 얼른 불 끄고 자라는 어른들 말을 무시하고 토요일 밤마다 브라운관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그때 '대부'를 보았다. 청소년관람불가인 이유는 자극적이어서 라기보다는 아이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가 아닐까. 내겐 알 파치노와 말론 블란도만이 강렬하게 남았다. 

 시칠리아 섬이 마피아의 본거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근엄한 갓 파더보다는 베레모를 쓰고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토토와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봐주는 알프레도를 만나고 싶었다.      


원색의 시칠리아가 좋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콤한 까놀리의 뒷맛이 기분 좋게 혀끝을 맴돈다. 헤어진 건물 사이에 걸린 줄에는 원색의 빨랫감이 나풀나풀 춤을 춘다. 골목 끝에는 스카프를 터번처럼 두른 덩치가 넉넉한 아낙들이 모여 수다를 떤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태양을 머금은 건강한 검은 피부를 가졌다. 이탈리아 남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릿빛 피부가 아닌 흑표범을 닮은 검은 피부다. 뜨거운 바람 시로코(sirocco)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바다를 넘어오듯 사람도 넘어온다. 2천 년 전 카르타고와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격전을 벌일 때 로마의 정치인 카토는 탐스런 무화과를 원로원으로 들고 와 이런 말을 했다.

  "이 무화과는 로마에서 뱃길로 사흘 걸리는 곳에서 난 것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무화과의 산지였고 카토는 카르타고의 격멸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2천 년 전이야 어쨌든 지금은 이탈리아의 땅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9월의 오후를 보낸다. 골목 저 끝까지 태양이 떨어져 내려주니 무서울 것이 하나 없다. 지난밤의 기억 따위 깡그리 잊은 여행자에게는 나른함만이 남는다. 


다그닥다그닥, 마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도로 지나다닌다. 


 구시가에 가까워질수록 거리에는 사람이 늘어난다. 현지인, 여행자, 심지어 마차까지 복닥복닥. 그리고 그 소란함을 한순간에 잠재워버리는 소리.

 "탕!"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였다. 아, 콰트로 칸티'인 것 같았다.'. 팔레르모에 할 일 없는 남자는 다 여기에 모였나? 싶을 정도로 구경꾼이 넘쳐났다. 그 틈바구니를 뚫고 지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번거로움을 이겨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case closed'. 들것에 사람이 실려 나가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얇고 하얀 천에 덮인 채.

  


 그는 마피아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뒷골목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총을 들이대는 냉혈한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 여기는 태양이 가득한 시칠리아인데! 순식간에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 아래로 이동한 듯 했다.

 "유 오케이(You okay)?"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 문장이 날 팔레르모로 되돌려놓았다. 알프레도 할아버지를 닮은, 콧수염이 근사한 아저씨였다. 다만 이 아저씨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난 경찰과 군인 한복판에 서 있었고 어떻게든 날 안심시키려 허둥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경찰 두 명이 숙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물다며, 너의 시칠리아 여행이 이 일 때문에 엉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현장으로 돌아갔다. 

 숙소는 콰트로 칸티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발코니에 서면 콰트로 칸티 3층에 조각된 팔레르모의 수호 성녀들이 눈을 맞춰주는 그런 곳. 그들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며 얼마나 많은 비극을 지켜보았을까.


그밤 내내 비가 내렸다.


 해가 넘어가자 가는 비가 조용히 팔레르모 시내를 적셔주었다. 비는 밤새도록 계속 되었다. 그 도시에 깊게 스민 피를 씻어내겠다는 듯이.

 

숙소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무지개.


 무지개가 걸린 다음 날 아침, 숙소 근처 카페를 찾았다. 아마 밤을 새지 않았을까 싶은 퀭한 얼굴의 경찰 서너 명이 에스프레소를 앞에 두고 주인과 수다를 떨고 있다.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부온 지오르노(Buon giorno)!"


 이를 드러낸 환한 미소가 돌아온다. 3천 년 전 그리스 인의 식민 지배를 시작으로 지난한 식민지의 역사를 살아내 온 시칠리아. 그들은 결국 살아남았다. 새로운 상처 위에는 섬사람 특유의 강인함과 이탈리아인 특유의 유쾌함이라는 연고가 덧발라질 것이다. 그 아침의 웃는 얼굴들이 미더운 이유다.

 


 

 뱀다리. 이로부터 2년 후 나폴리에서 열흘 동안 머문 일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을 보고 톨레도 거리를 따라 움베르토 1세 갈레리아까지 내려왔을 때 또 한 번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명품 매장이 모여 있어 나폴리에서 제일 안전한 편인 움베르토 1세 갈레리아 입구에 있는 자라 매장의 쇼윈도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앞에는 누군가의 사진과 함께 꽃, 양초 등이 놓여 있었다. 내가 나폴리에 도착한 날인 하루 전 이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올 여름, 두 번째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 중인데 그 누구라도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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