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만사人事萬史
때는 고려시기.
햇살이라는 뜻의 현晛이란 이름을 가진 왕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세서 각궁을 잘 다루었는데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 시위만을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기마술과 격구에도 능하였고 수박희라고 하는 전통 격투기 또한 자주 즐겼습니다.
그런가하면 왕이 된 이후에는 '고금상정례'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였는데요, 고금상정례는 말 그대로 옜날과 지금의 모든 예법을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는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엄친아였던 것이죠.
심지어 그는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자신 주변의 무사들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는데요, 경상도 소금장수의 아들로 미천한 천인이었던 사람을 직접 최하급 장교인 대정에서 정7품인 별장까지 파격승진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왕은 그에게 왕실의 호위를 맡길만큼 크게 아꼈는데요,
어느 해 겨울, 왕은 순행을 떠나다가 보현원이란 절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장하도다! 이 곳에서 병법을 연습하고 익힐 수 있겠구나!"
그리고는 그는 순행에 지친 무장들을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를 하여 사기를 올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수박희를 하던 3품 대장군 이소응이 힘이 부쳐 달아나자 5품의 내시였던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치고 비웃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사실상 고려 왕실을 멸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무신정변이 일어납니다.
잘 아시겠지만 위의 왕은 고려 의종입니다.
의종은 묘청의 난 진압 이후,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을 누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고려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축적된 국력 또한 충분했기 때문인데요.
의종은 천대받는 무신들에게 개인적인 총애를 베풀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저 인간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왕 스스로가 망가뜨려놓은 국가에서 발전적인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었죠.
당시 고려는 전형적인 말기 왕조의 행태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오죽하면 백성들이 하도 노역에 끌려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노역에 나간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하기 위해 아낙이 머리카락을 팔았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났습니다. 의종 시기 백성들은 고단했고 문벌귀족은 득세하며 나라가 갈수록 어지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이소응과 한뢰의 사례처럼 무신들은 문신들에게 무시까지 받았으니 불만이 쌓일 수 밖에요. 결국 상장군 정중부와 젊은 장수들인 이의방, 이고 등이 의기투합해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의종은 이후 몇달 만에 폐위당했으며 그를 복위하기 위한 반란이 일어나자 추가적인 반란을 우려한 무신정권에 의해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 날, 그를 죽이러 온 것은 의종이 발탁하여 파격 승진을 시켜준 천민 출신의 별장인 이의민이었습니다.
이의민은 곤원사라는 절로 의종을 모신 후 술 두어 잔을 따라 올렸습니다. 그리곤 그는 의종의 등뼈를 부러뜨리며 하늘이 떠나가도록 웃었습니다. 그의 수하인 박존위가 담요로 허리가 부러진 의종을 싸고 2개의 가마솥 사이에 넣어 연못 속에 던져버렸으니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사람 치고는 그 최후가 너무나도 비참할 수 없습니다.
의종은 김돈중, 한뢰, 이의민 등 여러 사람을 아끼고 발탁하였으나 한뢰는 무신정변의 도화선을 만든 인물이고 김돈중은 보현원의 난리가 나자 몰래 도망갔다가 잡혀 죽었습니다. 이의민은 한 술 더 떠 의종의 허리를 꺾어 그를 시해하였죠.
리더가 직원을 아끼고 총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직원을 아끼고 총애하는 과정이 잘못되고 그 총애를 기반으로 다른 직원에게 위해를 가하면 해당 직원을 제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어받지 않는 총애는 방종으로 이어지고 조직 전체의 통합에 균열을 불러오기 쉬우니까요.
또한 리더 자신이 아낌없이 주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구성원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진 하나의 객체입니다. 이를 리더의 생각으로 예단하여 걱정없이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다가는 불필요한 문제를 겪을 지도 모릅니다.
리더는 모든 일에 대해선 알지 못해도 모든 일을 책임져야하는 사람입니다. 위임한 직원이 책임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총애와 관찰을 적절히 활용해야 하는 것.
고려 의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