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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방 Apr 02. 2024

암튼 다 엄마아빠 때문임 7

아무튼 모든 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근데 사실 난 혼자 살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혼자 살지 않을 거고.


내가 사립 초등학교에 밀어 넣어졌다가 갑자기 옮겨져 두 번째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당시의 나에게는 아직 엄마를 미워할 자격이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를 미워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모욕을 주고 학대를 하든, 무한한 사랑만을 바쳐야 한다. 요즘 '먹지 못하는 여자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정신병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부분이 나왔다. 그러니까 학대를 당한 이들도 나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증세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엄마가 나를 때렸다는 것조차 얼마 전까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엄마가 나를 조금 엄격하게 대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힘든 사람. 오빠와 아빠 때문에 약간 망가졌던 사람. 환자라서 괴로웠고, 나를 사랑했지만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인, 선량한 피해자. 그게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엄마가 나를 때린 건 체벌이었고 오락가락하던 건 주위 환경이 엄마를 그렇게 몰아가서다. 엄마는 날 사랑한다. 엄마는 정말로 날 사랑한다. 엄마는 날 위했다. 엄마가 가정폭력범일 리가 없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니까. 엄마가 날 학대했다면, 내가 대체 왜 엄마를 사랑하겠는가?


엄마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절대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지 않다. 나는 불행하고 가녀린 여자다. 내 인생의 고달픔은 모두 외부에서 왔다.


그래서 엄마와 내가 합심해 찾아낸 범인이 누구였냐면, 아빠였다.


아빠가 무고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엄마와 나는, 우리는, 아빠의 없는 죄를 지어내 십자가를 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빠가 알아서 혼자만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려던 사람이었던 건 맞다. 아빠는 엄마만큼이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게도,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끌렸던 것 같다.)


난 언제나 아빠 욕을 실컷 하고 싶었다. 실제로 주위 친구들한테도 아빠 욕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아빠를 비난하고 싶은 욕망이 완전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요즘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아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벗겨서 세상에 내던져 저 역적을 보라고 소리치고 싶건만 공교롭게도 아빠와 나는 낯선 사이다.


엄마가 말해 준 아빠에 관해서는 잘 안다. 아빠는 우유부단하고, 모든 일을 남에게 떠넘기고, 자기 형보다 못한 사람, 유흥에 약하고 바람기가 있고 책임감이 없으며 나약한 인간이다. 실제로 우리 아빠는 가족들을 남겨 두고 계속 사라졌다. 문제가 발생하면 엄마가 해결하도록 내버려 둔 채 집을 나가 버렸다. 자식들에게는 거의 신경을 쏟지 않았다. 나한테 남아 있는 기억 속 아빠는 늘 나에게 무언가를 빼앗거나 지극히 무관심했다. 자라면서 아빠가 나를 보호한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아주 어릴 때 계곡에서 놀다 튜브를 놓쳤다. 어린 내게는 계곡 물이 너무 깊었고 난 겁이 많은 아이라 금세 공포에 질렸다. 그때 아빠가 뒤에서 나를 번쩍 안아올려 주었다. 그때 느꼈던 안심, 보호받는다는 실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게 아빠와 나 사이에 남은 유일한 좋은 기억이다.


아빠와 나 사이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기억은 이런 거다. 내가 다른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성인 입양을 신청하자 아빠는 내 변호사에게 집요하게 전화를 걸고, 내 동거인(지금은 자매)에게 자기 소견서를 복사해서 보내고, 막상 재판이 열릴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변호사에게 내가 몸을 팔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나는 재판 당일 변호사에게 전화로 내 가정사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아빠는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때는 가족을 피해 도망쳐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다가, 필요하면 불쑥 나타난다. 자식이 친부모 관계를 끊을 방법은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가출 이후 아빠가 간단히 뗄 수 있는 가족관계 증명서에 적힌 주소로 내킬 때마다 찾아오는 짓을 견뎌야 했다. 아빠가 올까 봐 무서워서 한동안은 주소지를 옮기지 않기도 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아빠는 내 카드 사용 내역을 다 알고 있었고 판사에게 내는 소견서에 그 내용을 당당하게 썼다. 내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고, 우리 동네에 서서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때 방탕했지만 자기는 딸을 정말 사랑한다고, 정말로 자신만만하게 썼고 나더러 읽으라고 복사본을 보냈다.


난 분명 나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려고 했건만 왜 아빠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아빠는 부재다. 엄마는 존재했고 아빠는 부재했다. 아빠는 부재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히 있는 아빠가 나에게는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있는 자리까지 전부 차지하고 딸을 아낌없이 통제하며 지배했고 아빠는 명판만 걸어놓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내게 아빠란, 아주 큰 존재감을 지녔으면서도(나의 유일신이자 전부였던 엄마는 아빠에게 정말 연연했으니까) 도무지 볼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는 아빠가 더 편한 적도 있다. 엄마와 있으면 모든 것을 검열당해야 하지만 아빠는 내게 무심해서 나를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엄마와 있을 때는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백아흔아홉 가지의 조건에 부합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내 존재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당했다. 아빠는 나를 방관했다. 머리카락과 손발톱까지 엄마 마음대로 해야했던 여자아이에게 그건 너무 달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아빠를 좋아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아빠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아빠는 없으니까. 없는 사람은 의견을 낼 수 없다. 항변도 할 수 없다. 아빠는 자신의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방법을 택했다. 나중에 나는 엄마와 아빠의 방법을 모두 터득한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아이는 참으로 부모의 분신이다.


엄마는 아빠를 증오했다. 이건 엄마와 아빠, 나와 내 형제들 모두가 인정할 법한 사실인데, 엄마는 힘들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엄마가 나를 지극히 통제적으로 학대하는 한편 방치한 것은 바로 그래서다. 엄마의 주장에 따르자면 인생 때문이자, 신에 의한 시련이자……아빠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도 아빠를 증오했다.


아빠를 증오할 때 엄마와 나는 한 팀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와 한 팀이기도 했다. 아빠가 나를 자기 팀으로 뽑아가서는 아니다. 엄마가 힘든 이유로 나도 지목되어서다. 아빠는 자기 문제에 갇혀 있느라 바빠서 나한테는 별감정이 없었다. 엄마는?


엄마는 나를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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