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 때문만은 아닐지도?
아빠의 의견서인지 뭔지를 받고,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숨이 막혀 울면서 깨어나던 때였다. 나는 생각했다. 이거 글로 쓰자.
완전 팔리겠는데? 내 얘기를 글로 써서 팔자. 그런 책 많잖아. 요즘 나온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 라든가. 내가 미국을 들썩이게 한 아역 배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여기 나오는 엄마랑 우리 엄마랑 비슷하니까.
생각해 보니 난 아동학대도 당하고 자살 시도도 하고 연애도 존나 실패하고 평생 정신병자로 산 데다 친구네 집에 성인 입양까지 됐잖아? 거기다 오빠랑 엄마가 난치병으로 죽고 아빠가 도박도 했어! 쩐다. 엄청나게 특별해.
기본적으로 작가란 자기 이야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자신을 평범하다고 소개하는 작가들조차 그렇다. 본래 모든 인간은 평범하고, 평범한 이들이야말로 특별하다는 사실을 제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큼 특별한 얘기라고 믿지 않고서는 그토록 애를 들여 쓰고 또 쓸 리가 없다.
최근에 브런치에 올라와 있는 글들을 읽었다. 모두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굉장히 다양한 얘기가 올라와 있었는데, 아동학대는 물론이고 다양한 신경증과 상실에 관한 것까지 무궁무진했다.
흠. 내 케이스는 그닥 특별하지도 않군.
그야말로 산지옥이자 아수라장이라고 여겼던 내 인생을 약간 겸연쩍게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인간이란 참으로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물며 그가 무슨 인생을 살아왔는지 세세한 연대기를 안다 한들 그의 삶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인생은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며 나는 그가 되어 살아볼 수 없으므로.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나온 말처럼, 그자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그가 어떻게 걸어왔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싶다.
이 광막한 우주에서 우연히도 창백한 푸른 점에 떨어진 수많은 타인들이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래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건 목소리다. 이미 작가가 재해석한 삶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기에, 이야기야말로 바로 진실이다. 초콜릿을 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초콜릿을 입에 넣은 사람이 어떤 맛과 향기를 느꼈는지가 진정으로 중요하다.
내가 쓰고 또 쓰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와, 난 사실 특별하지 않아.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한 일을 겪었고 똑같은 생각을 했어. 난 특이하지 않아. 괴물이 아니야. 적어도 동족이 있는 괴물이야' 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나는 바로 그렇게 살아남았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느끼지 못한 연결감을 페이지 너머에서 찾으면서.
회복되었다고 느낀 날 이후, 이 글을 쓰기를 멈춰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돈을 받고 쓰는 글도 아니잖아. 마감도 없어. 알고 보니 대단히 특별한 사연도 아니었지. 무엇보다 이 너머에 연결된 사람들에게 하소연하지 않아도 난 이제 괜찮아. 드디어 비명이 멎었어.
하지만 지금 다른 마감들을 캘린더에 쌓아 둔 채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유는…….
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읽기를 원해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 수 있고, 회복된 자는 회복된 삶에 관해 쓸 수 있으니까. 설령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순간에조차 바로 내가 읽으니까. 내 이야기는 범상하고, 몹시 특별하니까.
최근 아비 모건이 쓴 '각본없음'을 읽으면서, 궁금했다. 이 엄청난 상실을 겪은 저자가 기어이 그 이야기를 낱낱이 써서 전세계에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쓰면서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을까?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의 저자는, 괜찮아졌을까? 브런치에 각종 글을 투고 중인 글쓴이들은 어쩌다가 여기 글을 올리자고 생각했을까?
난 그 답을 조금쯤 알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이 부서졌다가 이어 맞춰진 틈 사이로 스며드는 것 같다.
산산조각이 났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