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일기
나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아동 학대를 당했다.
대강 엄마가 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아빠는 도박 중독에, 툭하면 식구들을 놔두고 가출하는 사람, 빚을 떠메고 들어와 집에서 돈을 가져가는 인간, 엄마가 죽고 나서는 내게서 돈이든 정서든 무언가를 아낌없이 빼앗아 가는 가족이었다.
동생은 이만 생략한다.
그리하여 나는 졸업 후 가출을 했고 통장에 10만원도 없는 상태로 아는 동생의 집에 신세를 지며 20대를 시작했다. 미친년이 되기 좋은 조건이다.
내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하고 가난했고, 나는 자해와 자살 충동, 수치심과 불안, 불면과 우울과 공황을 달고 살았다. 대강 석 달 전까지.
이러저러한 치료 끝에 나는 드디어 태생적이라 믿어 왔던 수치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엄마 아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죽을 것처럼 떨며 숨지 않게 됐다. 가족을 제3자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법을 깨우쳤다. 매일 밤 찾아오던 자살, 혹은 소멸에의 갈망도 잠잠해졌다. 올해 6월은 최고의 시기였다. 현재에 머무르며 세상과 나 자신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진짜로 삶을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나아지는 시기란 그렇지 않나? 더 좋아지는 순간, 거기에 머무를 때 맛볼 수 있는 성취감. 러너스 하이에 도달한 것 같은 숨가쁜 생동감과 기쁨. 변화하는 느낌.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은 끝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짧아지기 전까지는 길고 지난하다.
피로와 불안은 또 다시 찾아오고, 상승 곡선은 완만해진다. 영원히 나아질 수는 없다. 그게 삶이다.
하물며 내게는 평생 유지해 온 고통들이 있었다. 내가 내 몸에 찰싹 붙이고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내 라이너스의 담요 말이다. 수치심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부터 쌓아온 나의 노력이 있었던 덕이고 적절한 치료자들을 만났던 덕분이지만, 상승 곡선에서 내 등을 밀어올려 주던 '과거의 나'가 있었듯 다시 내 발목을 잡는 '과거의 나' 역시 있다.
우울감은 한때 나를 보호해 주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했기에 나는 나를 더욱 상처 입힐 것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비록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되었으나 그는 내 친구였다.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환자들이 퇴원 및 회복을 앞두고 갑자기 진료를 그만두거나, 심각하게는 자살 시도에 이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얘기를 읽었다. 그들을 이해한다. 더는 환자가 아니라는 것은, 환자일 때 멈춰 놓았던 것들로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환자이기에 용인되었던 것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는 끝없이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죽고 싶지 않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살려 두는 것 이상을 해내야 한다.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두려워할 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고 세상은 혼란한데도.
미친년이 아니게 되면 모든 것이 굉장히 쉬워질 줄 알았다. 일부는 사실이다. 다리에 차고 달리던 모래 주머니가 떨어진 것처럼 가뿐하다.
반면 아프던 시절이 참 좋을 때였구나 할 때도 있다. 무슨 소린가 싶겠지? 무슨 소린지 이해하는 사람 역시 있을지도.
가끔은 환자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미 나는 잘 알고 있다.
올해 여름에 나는 괴물에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괴물로 살아가는 것과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 못 이루던 새벽에 일기를 쓰다, 이것들을 써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복과 그 후의 이야기를.
인간은 상처받고, 망가지고,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다시 덫에 걸린다. 삶은 계속된다.
나는 오직 나를 믿고 싶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 쓰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