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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길가의 존재들

by 현이


올해에는 휴가가 몇 번 없었지만, 이상하게 휴가인 날에는 아침에 비가 오곤 했다. 덕분에 비가 거세게 오다가 정오쯤 되면 개는 날씨를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창밖을 바라보는 지금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밝아졌다.


아침에 이른 시간에 병원에 다녀와서 카페로 가려는데 비가 거세게 왔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바지가 다 젖어 결국 걸어가기로 결정해 버렸다. 다 젖은 상태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자니 그냥 걸어가는 게 나았다. 그리고 가려던 카페 대신 집에 곧장 가기로 했다.



호핀치 (대흥동)

집에 오는 길은 숲길 공원을 따라 걸어오면 된다. 길을 가면서도 여전히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갈 엄두가 안 났다. 별 수 없이 걸음 하던 찰나, 공원에 있는 카페가 생각났다.


주말에는 사람이 워낙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 가보지는 못했던 작은 카페. 바지가 다 젖어 앉아서 쉬어가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고, 그냥 집으로 가는 길을 조금만 서럽지 않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는 휴일에 병원에 가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말이다.


그곳은 우드톤의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작은 카페였다. 비가 많이 오는 평일에도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시그니처 메뉴인 호지차 라떼를 주문했다. 비가 오니까 추웠고, 병원에 다녀오는 마음도 추웠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는 따뜻한 라떼류가 땡긴다.



호지차 라떼

따뜻한 우유를 링 모양으로 품고 있는 호지차 라떼는 너무 예뻤다. 호지 맛을 잘 모른다. 말차, 녹차와 비슷한 듯 다른 맛이 났다. 약간의 달콤함도 잘 어울렸다. 그 한잔이 뭐라고,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따뜻한 호지차 라떼를 받아 들자 걸음을 할 용기가 났다. 나그네처럼 다시 길을 나섰다.


숲길을 걸어가면서 중간중간 호지차 라떼를 홀짝거렸다. 마침 빗줄기도 조금 사그라들었기 때문일까, 애써 괜찮은 척했던 집에 오는 길이 낭만적인 비 오는 날 산책길로 바뀌었다. 손에 들린 따뜻한 라떼 한 잔이 큰 위로가 되어줬다. 이 한잔이 뭐라고.. 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했다.



비오는 산책길

걸어왔던 길처럼, 길가에 중간중간 있는 존재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오는 길에 쉼터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존재들. 그 작은 순간 덕분에 누군가는 다시 길을 바라보게 되고 걸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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