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 한 마리가 들어왔다. 잠깐 열어둔 방충망을 통해 기습했다. 방안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꽃이 없는 걸 알고 다시 창문으로 날아간다. 커다란 창문은 유리창으로 막혀 있다. 윙윙, 커다란 유리창에 붙었다 날았다 방황하고 있다. 바로 아래 작은 창문이 열려있지만 닫혀 있는 커다란 유리창에만 집착한다. '바보야, 바로 아래 출구가 있잖아.' 말을 전해 보지만 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 쌓여가는 공문에 정신없이 한 주를 흘려보낸다. 기한이 정해진 실적은 내 목을 옥죈다. 어떤 일을 시작했지만 '다른 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를 끝내기 무섭게 추가 업무가 나를 반긴다. 겨우 일에 집중하면 흐름을 뚝뚝 끊는 전화벨이 울린다. 이렇다 보니 일을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이다. 출근 하자마자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양쪽 시야가 막힌 경주마처럼 달리고 맞이하는 주말 역시 녹다운이다. 내가 유리창에 집착하는 벌과 무엇이 다를까.
문득 회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일이 신경 쓰면 한도 끝도 없어." 아내가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다. 명예, 승진, 책임감. 무엇 때문일까. 조직은 개개인을 챙겨주지 않는다. 힘든 이가 있다면 누군가는 편한 게 세상 이치다. 가끔 일과 가정 둘 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벌을 창밖으로 보내주기 위해 책받침으로 유도했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몸에 닿자 미친 듯이 날뛴다.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줄 알았나 보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한 상태에선 호의가 마냥 반갑지 않다. 지저분한 책상 위나 주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 갈 때 누군가 나를 툭 건드리는 것은 발작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다. 직장에서 꾹꾹 눌러 담았던 화가 집에서 폭발한다.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검색했다. 내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까이 내 말을 들어주는 이에게 묵묵히 쌓인 시커먼 감정을 배설한다. 그렇게 나는 또 부끄럽고 만다.
인생이란 항해도 숨 돌릴 기항지가 있다면 좋겠다. 이왕 바라는 거, 따뜻한 바람이 1년 내내 밀려오는 고즈넉한 부둣가이기를 꿈꾼다.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잔 뒤, 바다에 둥둥 떠다니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없이 게으른 시간을 보내다가, 언제든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떠나도 괜찮은 곳. 그렇다. 쌓여가는 업무가 두려워 연차 쓰는 게 두려운 나지만, 나는 훌쩍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었다.
젖은 솜처럼 마음이 무거워지는 날이면 몸은 남쪽 땅으로 기운다. 넉넉한 자연에 안겨 쉬고 싶다는 열망이 등을 떠미는 것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니, 어느새 계절도 지나가고 있다. 가랑비가 꽃잎을 다 떨구기 전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목적지는 바다다. 파도 소리에 호흡을 맞춘 채, 사사로운 시름일랑 씻어 내리고 싶었다. 물기 어린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광활한 풍경이 들어왔다.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나빠졌다 나아지는 내 기분을 보는 것 같다. 파도처럼 들쭉날쭉한 내 마음에도 조금씩 하얀 실뿌리가 내리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어 맨발로 걷기에 좋은 날이다. 시원한 파도가 발을 간지럽힌다. 어린 시절, 비바람이 지나간 해안가에는 숭어가 밀려오기도 했다. 갈매기와의 시간 싸움. 먼저 발견한 사람이 승자다. 바위틈에서 해삼도 줍고, 조개도 팠다. 담묵빛 추억이 손에 닿을 듯 아물거렸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싱그러운 솔향이 확 밀려든다. 솔숲 너머로 작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해풍에 색이 바랜 간판이 쓸쓸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골목대장 검둥개가 적막을 깨뜨린다. 기분이 퍽 좋은 모양인지 왕왕 짖으며 꼬리를 이리저리 흔든다.
드라마처럼 특별한 인연을 만나고, 낯선 여행지에서 의외의 사건을 겪진 않는다. 예약한 펜션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흐드러지게 낮잠을 잤다. 먹고, 쉬는 단순한 여행이지만 그 과정은 넌지시 위로를 건넨다. 해가 저물었지만, 발그레한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바다를 노르스름하게 비추는 빛을 손에 담아 쥐었다. 따스하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마음속 깊숙이 울려 번진다. 바다에 오면 내 고민 같은 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바다를 누비는 내내 다정한 볕과 함께했다. 온기가 남은 해변가에 달빛이 한 줄기씩 찾아든다.
성나서 날뛰던 마음도 잔잔히 가라앉는다.
밀려왔다 쓸려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나빠졌다 나아지는 내 기분을 보는 것 같다 파도처럼 들쭉날쭉한 내 마음에도 어느새 하얀 실뿌리가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