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만드는 남자
내 직업은 다이어리 만드는 남자다. 어쩌다 사장님이 되었다.
다이어리를 만들게 된 사연에 앞서 과거 직장생활을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취준생 1년을 거쳐 당당하게 대기업이라는 곳에 취업을 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입던 정장이 아닌 출근길에 정장을 입고 신입사원 오티를 받으러 가던 날이 나는 아직도 생각난다. 그것도 벌써 10년 전 일인데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만큼 취업이라는 것은 임팩트가 강하다.
얼마나 좋았던가? 근데 왜 좋았을까? 취업을 해서?
학벌이 좋지 못한데 대기업에 들어가서 좋았던가?
월급을 받아서 좋았던가? 백수가 끝나서 좋았던가?
종합적이다. 백수도 끝났고, 직장생활도 해보고 싶고, 월급도 받아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기계과가 서울에 근무하는 걸 가장 해보고 싶었다. 사실 기계과 출신이 서울에 근무하는 경우는 확률상 높지 않기 때문이다.
엔지니어가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그런 달콤함에 취해 서울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한 때 드라마 미생이 한참 유행을 할 때, 상사맨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야 건설회사 엔지니어라 조금은 달랐지만, 하는 일에 일부는 겹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문계와 이공계의 중간 역할을 하며 나의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6명의 동기와 직장생활을 같은 팀으로 시작했는데, 내가 나이가 젤 많다. 그래서 참 철딱서니 없는 형이자 오빠로 지냈던 것 같은데, 기회는 늘 나에게 왔다. 나이 때문인지, 일을 잘해서인지 모르겠으나, 둘 다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렇게 난 호주 출장을 시작으로 1년 만에 대리 진급을 하는 영광과 함께 나름 괜찮은 위치에서 직장생활에 취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났다. 나름 유연하게 일을 하려고 했지만, 한 사람이 잘 되거나 칭찬을 받으면 누군가는 시기 질투를 하고 누군가는 나와 멀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 또한 나에게는 참 큰 숙제였다. 그들 모두에게 친절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서 나는 퇴근 후에 그들과 늘 술자리도 같이 하려고 노력했다.
해외 건설현장 근무만 20년 넘게 하신 부장님께서 나에게 늘 이야기하셨다. 대리까지는 질문 많이 해라. 과장돼서 모르면 쪼팔리기 시작한다고... 그래서 그 시기 부끄럽지 않으려고 참 열심히도 일 했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는 점점 어려워졌다. 대기업이라는 타이틀보다는 구조조정, 합병, 채권단 이런 단어들이 익숙해지고, 매 학기 방학이 오는 것처럼 구조조정을 했다.
어제까지 죽고 못 살던 사이였지만, 떠나는 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참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결국 언젠간 나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이건 빨리 나가세요 보다 무서웠다. 여기서도 좋은 줄을 잡아야 오래 남는다는 생각으로 동아줄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짠했고 이해가 되면서도 불쌍해 보였다.
그 시기 우리 팀은 회사에 가장 큰 수익을 만들며 프로젝트를 종료했고, 최우수 사원상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 팀은 없어졌고, 우린 희망퇴직을 했다. 우린 그 라인이란 것에 실패한 상사님을 모셨기 때문일까? 난 사실 다른 팀으로 가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난 그 달콤함이 너무 싫어나보다. 6년간 함께 했던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희망퇴직이 정해지면, 군대 말년병장과 비슷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애들하고 나가서 한 시간 커피 마시고 오고, 점심시간 일찍 나가서 밥 먹고, 오후에 그룹 동기들하고 노가리를 까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와 함께 떠나거나 곧 떠날 그들은 다음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혼란스러웠다. 나도 그런 회사를 찾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가을 퇴사를 결심하고 시간이 참 많았다. 당시, 책도 사고 유튜브도 봤다. 그 시절 나는 두 가지를 해보고 싶었다. 앱 개발과 부동산이었다. 순서가 무엇이든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부동산 경매를 먼저 공부했다.
퇴사하고 경제적 자유라는 타이틀만 믿고 부동산 경매 공부 더럽게 열심히 했다. 부동산 경매 입찰장을 가보지도 못했고, 공부만 했다. 그러니 돈을 벌 수가 없다. 오히려 심각한 방황에 빠진다. 경험도 없고,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혼자 임장(부동산 경매 현장)을 계속 다니며 입찰 준비를 하고, 하루에 4~5개 현장을 돌고 집에 와서 다시 물건을 찾고 반복했다. 임장과 묻지 마 입찰이라는 무서운 것을 두 달 내내 반복했고, 40번 입찰을 하고 어렵게 첫 낙찰을 받았다. 와~ 기분 좋다 이럴 줄 알았는데, 난 그게 뭔가 아쉽기만 하고 어설프기만 했다. 공허하고 허무했다. 나의 길이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참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그 시기 또 운이 좋게도 달콤한 제안을 받는다. 공부했던 강사님이 오픈하는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경매를 공부했더니 경매 플랫폼 회사다. 앱개발도 공부하고 싶었는데 ... 월급 없이 1년을 넘게 버티다 보니, 희망퇴직 때 받은 돈은 다 소진되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그때의 나는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고,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취업을 하고 딱 3년을 스스로와 약속했다. 왜 했냐고?
스타트업에 첨 들어올 때는 자신감과 젊음, 열정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군대보다 더 올드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주일간 나의 선택에 그렇게 후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다 내 잘 못이라고 생각하고 회사에 올인했다. 미친 듯이 해봤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는지? 모를 것 같다.
내가 처음 퇴사를 하고 백수로 돌아가니, 주변 사람들이 내가 뭘 할지 참 궁금해했다. 나도 바보 같은 게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의식을 하게 되니, 내 선택에 대한 이상한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래서 또 바보같이 나는 그냥 미친놈처럼 열심히 살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4시 반에는 사무실에 도착했다. 혼자 앉아서 맨날 고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매출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 회사도 아닌 것을 난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사실 내가 모시던 대표에 대한 애정도 있었고, 이왕 하는 거 잘해보자는 각오도 있었다. 기획을 맡으니 모든 파트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야 했다.
스타트업은 정해진 것이 없다. 그만큼 기회도 많다. 그냥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서 보고했다. 사실 퇴사할 때까지 그렇게 많은 지시를 받아보지도 못했고, 나중에 지시만 했던 것 같다. 워낙 계획 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돈을 벌 궁리를 했다. 그렇게 계속 도전하고 시도를 했다.
성장은 1년이 지나니 보이기 시작한다. 신기했다. 돈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도 돈을 벌리는 구조까지 되었다.
딱 2년 반 정도 되니 앞으로 좀만 더 잘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성장에는 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나도 그 작은 부분에서는 공헌을 한 것 같다.
3년 차가 되었다. 새벽 출근은 반복했고, 저녁마다 와이프랑 술을 마시거나, 회식을 했다. 이기적인 보디라인을 계속 유지했지만, 체력은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내 마음속의 진짜 이야기였다. 나는 계속 회피했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못할 것을 알면서 그냥 계속 버텼다. 3년간 한 것이 아깝다는 이유로 포기를 못하고 달콤한 월급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스트레스만 계속 받고 있었다. 결국 6월 어느 날 몸이 완전 고장 났고, 몸이 아프고 대상포진에 걸리고 말았다. 30대에 대상포진은 마음속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지고 온다. 그때부터 퇴사까지 나는 참 많은 고민과 방황을 했다.
혼자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내가 이런 행위를 많이 좋아하는데, 결론이 결국 퇴사였다. 나는 월급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내 일도 아닌데, 정치싸움이나 하는 것도 웃겼다. 족보도 없는 사람들이 와서 윗자리에 앉아 있는 꼬락서니도 내 입장에서 용납이 안되었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닌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계속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건전하게 성장하고 싶었다.
꼭 이런 시기 눈치도 없게 세상은 나에게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한다. 내 잘 못도 아니고, 대화로 풀 수 있는 일이 골이 깊어진다. 변명도 하기 싫고 죄송하다고 수긍은 했지만, 사실 아직도 자존심 상한 일이다. 그렇게 일은 점점 꼬여져 간다. 내가 충신이고 오른팔처럼 보였을까? 내가 나간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결국 9월 가을이 왔다. 사직서를 냈다. 모든 걸 포기했다. 결국 내 것도 아니었다. 붙잡는 사람도 있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는 내가 나와야 기회를 얻는 것이 회사다. 미련 없이 나왔다. 아직도 가끔 짜증 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의 선택을 나는 존중한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 2010년 30살에 스타트업을 만들 능력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직장생활이란 걸 너무나 해보고 싶었다. 36살에 창업은 못했지만, 스타트업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는 것도 경험을 쌓았다. 39세에 코로나가 세상을 위기로 만든 지금 위기를 기회삼아 직장을 나왔다.
그때도 지금도 꿈은 있었다. 바로 월급 주는 사장님이 내 꿈이다. 엄청 성공한 사장님도 아니고 1인 기업 사장님부터 지금 시작을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들고 싶었던 다이어리를 만들고 세상에 팔고 있다.
근데 나의 과거에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후회는 없다. 자고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특히 어린 시절 직장생활과 조직생활을 해봐야 하고, 그곳에서 경쟁을 해봐야 한다. 요즘 1인 기업, 창업, 블로거, 유튜버 등 참 다양한 업종의 일이 생겼다. 좋다. 좋은 세상은 분명하게 맞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 기본적인 것을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 직장 가보면 수준이 다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다이어리 만든 남자 긴 과거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나에게 새로운 직장은 없다. 새로운 사업만 있을 것 같다.
달콤한 월급도 좋지만, 누군가의 달콤한 월급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건전하게 신선하게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