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발걸음, 카페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사람들, 고풍스러운 건물, 그 사이로 들리는 플룻 연주, 화창한 날씨, 신선한 야채를 살 수 있는 시장…. 신혼여행으로 가기 전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인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유럽은 대단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으로 처음 가본 크로아티아는 환상을 충족시켜줄 만큼 마음에 꼭 맞는 곳이었다. 자그레브에서 두브로브니크까지 도시를 옮겨 여행할 때마다 감탄을 쏟아내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또 다른 유럽 여행을 약속했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 끝판왕’은 이탈리아라며 크로아티아의 건물들이 조악하게 보일 거라고, 꼭 한 번 가보자고 얘기하길래 별생각 없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신혼여행 이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면 한동안 여행을 가긴 어려우니 그전에 한 번 더 길게 해외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임신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아직 생기지 않은 아이를 핑계로 여행을 계획했다. 얼마 없는 휴가를 쥐어짜 추석에 붙였더니 그럭저럭 유럽에 다녀올 만큼의 시간이 나왔다. 양가 부모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기껏해야 명절에만 찾아뵙는 자식들이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곧 여행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종 후보지는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스페인. 남편은 신혼여행 때처럼 이탈리아를 추천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남편이 몇 년 전 회사에서 이탈리아로 출장을 간다고 때만 해도 몸서리치며 싫어했었는데…. 시간흐름 버프를 받아 기억이 추억으로 탈바꿈한 걸 알고 있었는데도 결국 이탈리아를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인천에서부터 로마까지 경유 시간을 합쳐 14시간이 넘는 여정이었지만 9월 중순 이탈리아의 날씨는 모든 피로를 아드레날린으로 바꿨다. 우리는 시종일관 눈만 마주쳐도 웃었다. 회사와 집안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어떻게 놀까, 어디를 갈까, 뭘 먹을까에만 집중하면 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은 공항에서 로마 테르미니 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테르미니 역에서 기차로 피렌체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 첫 끼로 피자를 먹었다. 좀 짜고 퍽퍽한 것 빼고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워 보였다.
검표를 하고, 몇 번이나 플랫폼과 기차를 확인했다. 자리에 앉아 출발하기까지는 10여분. 남편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트립어드바이저로 피렌체에서 뭘 먹을지 검색하고 있었다. 어떤 외국인이 옆에서 서성거리길래 스윽 한번 쳐다보고 말았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남편에게 저녁 메뉴를 얘기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게 사라졌다. “당신 가방!”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까 내 눈치를 살살 보던 외국인이 가져간 게 틀림없다. 나는 혼비백산한 채로 뛰어 나가 기차 칸 사이에 놓아둔 캐리어를 확인했다. 캐리어는 무사했다. 코앞에서도 물건을 훔쳐간다는 이탈리아에서 가방을 그냥 선반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짓이었다. 플랫폼에 들어갈 때도 표가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모습에 안심한 게 화근이었다. 나는 가방을 끌어안고 있었기에 남편에게 ‘대체 왜 가방을 선반 위에 두고 자리를 비워! 화장실이야 기차 출발하고 다녀와도 되잖아!’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 역시 ‘내 가방을 훔쳐갈 때까지 뭐 하고 있었어!’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던 걸 참았다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남편 가방에는 새로 산 에어팟과 e-book리더기가 들어있었다. 가방도 심지어 최근에 선물 받은 투미 가방이었다. 그리고 지갑. 지갑 속에 들어있는 500유로가 문제가 아니었다. 신용카드와 남편의 여권까지 함께 없어진 게 문제였다. 부랴부랴 휴대폰에 꼈던 이탈리아 유심을 빼고 다시 한국 유심을 끼워 카드 정지를 신청했다. 자동 로밍으로 전화를 몇 통씩 해댔으니 아마 그때 나간 통화료만 몇만 원이 들었으리라. 여권도 단수여권으로 다시 발급받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남편은 한국에 돌아간 후 며칠 뒤 다시 프랑스로 출장을 가야 했다. 한국에 가서 여권을 발급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골치가 아팠다. 일단은 놀란 남편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여권 재발급을 받으려면 경찰서에서 분실신고증을 받아야 했다. 피렌체에 도착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배회하다 겨우 경찰서를 찾았다. 경찰서에서는 영어로 잘 소통이 되지 않은 데다가 안내원부터 경찰관까지 모든 사람들이 무척 고압적이어서 가뜩이나 지친 마음을 더 너덜너덜하게 했다. 결국 두어 시간 만에 받은 건 분실 내역에 도장이 찍힌 종이쪼가리였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남편을 달래며 괜찮은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했지만 몇 군데를 돌아다녀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일단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피렌체의 아르노 강에 파란 하늘과 멋들어진 건물들이 비쳤다. 끝내주는 날씨에 그림 같은 풍경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돌처럼 딱딱해진 마음에 어떤 것도 다시 감동의 파장을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믿기지 않는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숙소 도착 10여 미터를 앞두고 남편이 갑자기 멈춰 섰다. “어? 여보 나 휴지 좀.” 남편 코에서 코피가 후드득 쏟아졌다. 세상에. 10년을 넘게 봤지만 단 한 번도 코피를 쏟은 적이 없던 남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휴지를 꺼내 들었지만 옷은 피로 얼룩덜룩해졌다. 급기야 웃음이 났다. 둘이 한참을 낄낄대고 웃다가 좀 더 웃으면 울 것 같아서 빠르게 숙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호텔을 관리하는 할아버지는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고생했다고, 힘들었겠다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판 모르는 남이 해준 몇 마디가 마음을 녹였다.
방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다. 남편은 씻고 바로 자고 싶어 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남편이 잃어버린 가방에 칫솔과 면도기도 들어있었다. 이제 남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준 일회용 칫솔이 짐이라며 두고 내린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남편을 잘 다독이지 않으면 아마 트라우마로 평생 해외여행은 못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 정신이 멀쩡한 편이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일단 좀 자라고 하고는 칫솔을 사러 혼자 30분 거리의 슈퍼마켓에 다녀왔다. 저녁 8시도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밤중처럼 잠이 들었다. 테르미니 역에서 좀 짜고 퍽퍽한 피자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잠에서 깰 때마다 남편과 나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가방을 도둑맞은 것 때문에 우리 여행을 망칠 수는 없다고, 사람이 다친 건 아니니 다행이지 않냐고, 이제 더 나빠질 일은 없으니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추억일 거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온갖 위로를 건넸지만 그건 분노를 삭이는 다짐이자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한 주문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깼을 때 기분은 한결 나아졌지만 위로의 말을 가장한 합리화와 정당화는 여행 내내 매일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이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남편의 가방을 가져간 그놈이 에어팟을 끼고, 투미가방을 메고, e-book리더기로 책을 읽다가 낄낄거리며 500유로를 써댈 것이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올라 한 번씩 화가 치밀었다.
그 후 모든 여행지는 전쟁터 같았다. 건물이나 그림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뺏기려다가도 남은 지갑까지 뺏길까 봐 늘 긴장한 상태였다. ‘왜 이렇게 치안이 좋지 않은 걸까?’ ‘왜 이탈리아 정부는 도둑놈이 들끓는 자기 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걸까?’ 답을 들을 수 없는 항의에 가득 찬 의문만 늘어갔다. ‘도둑놈의 나라’로 악명이 높은 이탈리아에 절대 가지 말라고 캠페인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이탈리아가 밉고 싫었다. 사실은 너무 멍청하게 가방을 선반 위에 둔 남편과 그걸 보고도 내버려 둔 나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었다. 급기야 우리는 이런 기억을 남기게 한 그 도둑놈이 사실은 부모님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물건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거나, 소년가장이어서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등 온갖 미화된 서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은 일정은 별 문제가 없었다. 로마의 예술과 유산은 남편이 말했듯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의 정점에 있었고 압도하는 베드로 성당의 위용에 절도 사건도 힘을 잃는 듯했다. 잃어버린 유로 대신 신용카드를 실컷 긁으며 온갖 맛있는 것들을 먹었다. 도둑놈이 우리 여행을 망칠 수 없다는 위로를 증명하듯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나쁜 기억을 떨쳐냈다. 물론 유럽에 대한 환상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카페에서 주인 없는 노트북을 훔쳐가지 않는 한국이 그리웠다.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국뽕이 차올랐다.
한국에 돌아갈 여권을 순조롭게 발급받았지만 남편은 출국심사를 받을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 여권을 확인하곤 했다. 입국장에서는 단수여권에 문제가 생겨 혹시라도 출국을 하지 못할까 봐 체크인하는 내내 식은땀을 흘렸다.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프랑스 출장 때문에 여권을 재발급받아야 했다. 다행히 긴급여권이라는 제도가 생겨 아슬아슬하게 프랑스 출장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그랬듯이 프랑스에서도 하루에 수십 번 여권을 확인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강도가 여권을 빼앗아가는 악몽까지 꿨다고.
당분간 해외여행은 절대 가지 않을 거란 남편의 다짐을 도와주기라도 하는 듯, 이탈리아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세계를 휩쓸었다. 그렇게 여권을 꺼내볼 일 자체가 없게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심지어 남편은 그때의 다짐을 잊어버렸는지 이탈리아에 다녀오길 잘했다고 말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물론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분노가 고스란히 차오르는 걸 보면 가방 절도 사건이 완전히 없던 일이 아닌 흉터로 남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꼴도 보기 싫었던 테르미니 역이 조금은 그립다. 하늘이 비치던 피렌체의 아르노 강이, 사람들로 북적이던 스페인 광장이 그립다. 코로나19 때문에 이탈리아가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던데,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이 코로나 사태만 끝나면, 미운 마음을 씻어내고 오겠다는 핑계로 다시 가고 싶는 마음도 든다. 아이가 생기기 전, 코로나가 끝나 한 번 더 유럽에 다녀올 수 있을까? 유럽에 대한 환상은 분명 사라졌는데 연민이 늘다 못해 다시 환상이 차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