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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Jul 22. 2021

디즈니 옆 킹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까지 좋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와 남편에게는 영화가 그렇다. 일단 영화라는 매체의 선호도부터 다르다. 현실보다 상상 속이 훨씬 무서운 나는 영화가 너무 실제 같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 <1987>을 보면 2시간 내내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 같아 진이 빠진다. 그래서 보더라도 몰입이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나(물고기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기에) 여운도 교훈도 남지 않는 오락영화를 좋아한다. 반면 남편은 자기가 절대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이 나오는 영화를 선호한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현실에선 쫄보인 남편이 대담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로의 영화 취향을  알았던  아니다. 여느 청소년들처럼  거리라고는 노래방과 영화관이 거의 전부인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문화생활의 폭은 넓어지지 않았고, 데이트 코스로 영화관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하지만 막상 돌아보면 <아바타>  뒤에 고백받았던 크리스마스를 빼고는 남편과 같이 영화관을 나서며 기분이 좋았던 날이 별로 없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언성을 높인 대표적인 영화는 <월드워Z>이다. 때는 2013년, 이미 우리가 만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남편이 영화를 보자고 하길래 좀비 아포칼립스물인 줄은 전혀 모른 채 영화관에 들어갔다. 나는 곧 영화의 장면을 따라 도시 한복판, 집 안, 비행기 등 곳곳에서 좀비에게 도망 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공포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나랑 몇 년째 사귀는데 내 영화 취향도 모르는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따질 심산이었다. 영화는 늘 그렇듯 인류가 해결책을 찾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나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나는 이런 영화 잘 못 보는데 왜 이런 걸 골랐냐며 징징거리기를 몇 분, 몇 걸음 걷다 힘이 빠져 벤치에 앉기를 몇 번 하고 나니 남편이 영화 한 편 봤다고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은근히 타박했다. “나 집에 갈래.” 나는 잡고 있던 손을 홱 뺐다. 대체 이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서운하고 화가 났다. “잠깐만.” 남편은 횡단보도를 혼자서 빠르게 건너가는 나를 붙잡았다. “놔, 이거!” 홍대입구역 한복판에서 언성을 높이는 커플을 구경하기만 했지 그 커플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남편은 내 분노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잠깐만. 우리 대화를 좀 더 해보자. 아웃백 가서. 응?” “……. 그래. 좋아.” 간절한 목소리와 달래는 말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웃백 때문이 아니었다.)


폭립과 파스타로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자 남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주변에 스릴러를 못 보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는 전에도 분명히 얘기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며 내가 영화를 볼 때 얼마나 몰입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괴로운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지금도 여기 사람들이 갑자기 좀비로 변할 것 같아서 좀 무섭단 말이야.” 내 말에 남편은 씩 웃더니 <월드워Z>에 나오는 좀비처럼 잇몸을 드러내고 딱딱거리며 이를 부딪쳤다. 나는 기겁하며 째려봤지만 남편은 나를 쫄보라고 놀리며 집에 갈 때까지 좀비 흉내를 냈다.


“내가 물어봤는데 단이랑 름이도 좀비 나오는 거 못 본대.” 그날 이후로 영화를 볼 때면 나는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며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이상하다. 내 주변엔 없던데 당신 주변에만 따개비처럼 모여있네.” 장난스럽게 말하길래 웃어넘겼지만 남편은 <월드워Z> 이후에도 <암살>, <밀정>, <타이밍> 등 내가 좋아하지 않을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를 보고 데이트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남편은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최근에도 <랑종>을 같이 보자고 했다.


신기한 건 <월드워Z>로 기진맥진한 다음에 오히려 좀비물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한번은 명절 특선영화로 TV에서 <월드워Z>를 방영했는데 줄거리를 알고 봐서인지 덜 놀라고 긴장이 좀 풀려서 훨씬 재미있게 봤다. 게다가 좀비물은 현실에 없을 법한 설정이라고 생각해서 그나마 다른 스릴러에 비해 몰입이 덜했다. 그날 이후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한 영화 줄거리를 찾아보거나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산행>은 내가 먼저 남편에게 보자고 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줄거리를 꼼꼼히 찾아보긴 했지만.) 최근에는 <킹덤>이나 <스위트홈>을 남편 옆에 찰싹 붙어서 보며 연애 초반 공포영화를 보는 연인 클리셰의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주된 데이트 코스로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결혼할 무렵부터는 아예 영화를 따로 봤다. 어차피 영화관에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크린만 보는 거니까, 비슷한 시간대의 영화를 각각 예매하거나 각자 영화관에 갔다. 좋아하는 게 같으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부부나 연인이라는 관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니까 좋아하는 걸 꼭 둘이서 같이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떤 영역에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내 세계가 한층 다채로워지기도 하니까 좀 참아볼 뿐이다.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곧 <킹덤: 아신전>이 나온다. 아직 혼자서 볼 용기는 없지만, 남편과 같이 볼 거니까 괜찮다. 이럴 때는 남편의 영화 취향이 나와 다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었던 넷플릭스를 다시 구독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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