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까지 좋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와 남편에게는 영화가 그렇다. 일단 영화라는 매체의 선호도부터 다르다. 현실보다 상상 속이 훨씬 무서운 나는 영화가 너무 실제 같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 <1987>을 보면 2시간 내내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 같아 진이 빠진다. 그래서 보더라도 몰입이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나(물고기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기에) 여운도 교훈도 남지 않는 오락영화를 좋아한다. 반면 남편은 자기가 절대 경험해 볼 수 없는 일이 나오는 영화를 선호한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현실에선 쫄보인 남편이 대담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로의 영화 취향을 잘 알았던 건 아니다. 여느 청소년들처럼 놀 거리라고는 노래방과 영화관이 거의 전부인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문화생활의 폭은 넓어지지 않았고, 데이트 코스로 영화관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하지만 막상 돌아보면 <아바타>를 본 뒤에 고백받았던 크리스마스를 빼고는 남편과 같이 영화관을 나서며 기분이 좋았던 날이 별로 없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언성을 높인 대표적인 영화는 <월드워Z>이다. 때는 2013년, 이미 우리가 만난 지 4년째 되는 해였다. 남편이 영화를 보자고 하길래 좀비 아포칼립스물인 줄은 전혀 모른 채 영화관에 들어갔다. 나는 곧 영화의 장면을 따라 도시 한복판, 집 안, 비행기 등 곳곳에서 좀비에게 도망 다니는 기분을 느꼈다. 공포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나랑 몇 년째 사귀는데 내 영화 취향도 모르는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따질 심산이었다. 영화는 늘 그렇듯 인류가 해결책을 찾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나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나는 이런 영화 잘 못 보는데 왜 이런 걸 골랐냐며 징징거리기를 몇 분, 몇 걸음 걷다 힘이 빠져 벤치에 앉기를 몇 번 하고 나니 남편이 영화 한 편 봤다고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은근히 타박했다. “나 집에 갈래.” 나는 잡고 있던 손을 홱 뺐다. 대체 이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서운하고 화가 났다. “잠깐만.” 남편은 횡단보도를 혼자서 빠르게 건너가는 나를 붙잡았다. “놔, 이거!” 홍대입구역 한복판에서 언성을 높이는 커플을 구경하기만 했지 그 커플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남편은 내 분노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잠깐만. 우리 대화를 좀 더 해보자. 아웃백 가서. 응?” “……. 그래. 좋아.” 간절한 목소리와 달래는 말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웃백 때문이 아니었다.)
폭립과 파스타로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자 남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 주변에 스릴러를 못 보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는 전에도 분명히 얘기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며 내가 영화를 볼 때 얼마나 몰입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괴로운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지금도 여기 사람들이 갑자기 좀비로 변할 것 같아서 좀 무섭단 말이야.” 내 말에 남편은 씩 웃더니 <월드워Z>에 나오는 좀비처럼 잇몸을 드러내고 딱딱거리며 이를 부딪쳤다. 나는 기겁하며 째려봤지만 남편은 나를 쫄보라고 놀리며 집에 갈 때까지 좀비 흉내를 냈다.
“내가 물어봤는데 단이랑 름이도 좀비 나오는 거 못 본대.” 그날 이후로 영화를 볼 때면 나는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며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이상하다. 내 주변엔 없던데 당신 주변에만 따개비처럼 모여있네.” 장난스럽게 말하길래 웃어넘겼지만 남편은 <월드워Z> 이후에도 <암살>, <밀정>, <타이밍> 등 내가 좋아하지 않을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를 보고 데이트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남편은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최근에도 <랑종>을 같이 보자고 했다.
신기한 건 <월드워Z>로 기진맥진한 다음에 오히려 좀비물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한번은 명절 특선영화로 TV에서 <월드워Z>를 방영했는데 줄거리를 알고 봐서인지 덜 놀라고 긴장이 좀 풀려서 훨씬 재미있게 봤다. 게다가 좀비물은 현실에 없을 법한 설정이라고 생각해서 그나마 다른 스릴러에 비해 몰입이 덜했다. 그날 이후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한 영화 줄거리를 찾아보거나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산행>은 내가 먼저 남편에게 보자고 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줄거리를 꼼꼼히 찾아보긴 했지만.) 최근에는 <킹덤>이나 <스위트홈>을 남편 옆에 찰싹 붙어서 보며 연애 초반 공포영화를 보는 연인 클리셰의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주된 데이트 코스로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결혼할 무렵부터는 아예 영화를 따로 봤다. 어차피 영화관에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크린만 보는 거니까, 비슷한 시간대의 영화를 각각 예매하거나 각자 영화관에 갔다. 좋아하는 게 같으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부부나 연인이라는 관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니까 좋아하는 걸 꼭 둘이서 같이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떤 영역에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때문에 내 세계가 한층 다채로워지기도 하니까 좀 참아볼 뿐이다.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곧 <킹덤: 아신전>이 나온다. 아직 혼자서 볼 용기는 없지만, 남편과 같이 볼 거니까 괜찮다. 이럴 때는 남편의 영화 취향이 나와 다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었던 넷플릭스를 다시 구독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