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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Jan 19. 2022

농촌 판타지

여행을 가느니 그저 좋은 컴퓨터가 있는 방 한 칸에서 쉬는 게 좋다던 남편은 결혼 후 제주도에 몇 번 같이 간 뒤로 틈만 나면 ‘제주도의 푸른 밤’ 노래를 불렀다. “제주도에 살면 행복할까?” 남편의 질문에 나는 ‘거기도 사람 사는 데라 다 똑같다’라며 가차없기 대답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잊어버릴 만 하면 몇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다. 여행과 삶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나 역시 ‘제주도 한 달 살기’, 아니 ‘제주도 6개월 살기’, 아니 이왕이면 ‘제주도 1년 살기’는 해보고 싶다. 물론 제주도에서 재택근무를 한다거나 제주도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는 다음 직장이 보장된 상태에서 제주도에서 1년 푹 쉬었으면 좋겠다. 이정도 바람이면 거의 불가능한 소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꼭 제주도가 아니어도 괜찮다. 제주도든 어디든 아무튼 약간 한적한 시골에서 ‘리틀 포레스트’를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가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반지의 제왕’ 급의 (농촌)판타지 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시골생활 1년간 농사를 짓고 싶은 게 아니다. 농촌 체험활동을 조금 길게 해보고 싶은 것뿐이다. 체험활동이란 몸소 겪어보는 것이지만 실제 그 삶을 살아내는 것과는 다르다. 남이 끓인 라면의 한 젓가락, 여름날 먹는 맥주의 첫 한 모금이라고 해야 할까? 가장 맛있는 맛. 좀 어설퍼도 되고 실패해도 되는, 하지만 그저 시도해봤다는 것으로 의미있고 즐거운 그런 생활.


그러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도 친구들과 고모가 있지 않았는가? 남편을 꼭 데려가야 한다. 종종 친구들도 오라고 하고. 마을 사람들이랑 조금 친해지는 것도 좋겠다. 집에 손님 방 정도는 있어야겠다. 텃밭에서 조금씩 수확의 기쁨을 맛보도록 마당도 있고. 너무 낡지는 않았지만 아늑한 느낌의 한옥 집이면 좋겠다. 아! 부엌은 중요하다. 요리를 잔뜩 할 거니까. 요리 재료를 주문하려면 시장과 멀지 않거나 택배가 오는 곳으로 자리를 잡아야지. 영화 속에는 집에 에어컨도 없지만 쾌적한 생활을 위해서 좋은 전자제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요새 시골에 다 에어컨 있다. 건조기랑 식기세척기도 가져가야지.

 

일단 이정도 대략 집이 갖춰지고, 며칠은 뒹굴대고 잠도 많이 자고, 영화도 보고 쉬면 아마 곧 나는 뭔가 만들고 싶어질 것이다. 이때부터가 본격 ‘리틀 포레스트’의 시작이다. 우선 제철 과일로 잼을 만든다. 봄에는 딸기잼, 여름에는 오디잼, 가을에는 사과잼, 겨울에는 귤잼. 이틀에 한번 꼴로 빵을 반죽해서 굽고 종종 스콘이나 쿠키도 만들어서 잼과 곁들여서 먹는다. 홍차랑 신선한 커피는 필수다. 방 가득 커피냄새가 묻어나게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일상. 먼지가 가득 쌓인 휴롬도 온갖 매일 쓸 거다. 삼시세끼 집에서 밥을 먹을 테니까 반찬이 상할까 걱정할 필요 없이 잔뜩 만들어두면 된다. 남편이 좋아하는 호박잎도 쪄보고, 몇달 째 마른 채로 더 말라가는 곤드레도 나물로 무쳐야지. 요새 ‘이 남자의 cook’ 유튜브가 재미있던데, 요리 채널은 무궁무진하니까 시도해 볼 수 있는 요리들은 끝이 없다. 어쩌면 김치를 담그는 것까지 시도해볼지도 모른다.


낮에는 책을 보고 저녁에는 글을 쓴다. 종종 사진도 찍는다. 농촌생활을 주제로 하면 유튜브든 브런치든 인스타그램이든 콘텐츠가 무궁무진하지 않을까? 직접 텃밭에 키우는 채소들이 매일 얼마나 키가 크는지, 오늘은 어떤 나물 반찬을 해볼지, 아침의 하늘과 낮의 구름은 어떤 모양인지만 기록해도 무척 바쁠 것이다. 매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쓸 수도 있겠다. 지금도 없지만 TV는 들여 놓지 말아야지. 휴대폰과 컴퓨터, 넷플릭스도 별로 안 하고 싶다. 아침마다 운동삼아 뒷산에 오르고, 저녁에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매일 더 건강해지리라.


이쯤 쓰니 엎드러서 거북이처럼 목을 내어놓은 나쁜 자세로 아이패드에 타자를 치는 지금의 나에게 약간 현타가 온다. 그리고 나에게 지금 뭐가 필요한지,  장소가 시골이어야 하는지, 거기서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다를지, 행복회로를 멈추는 질문들이 튀어나온다. 오늘도 재택이라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기다리던 눈이 왔는데도 뭐가 바쁘다고 보러 나가지 않았는지. 시간이 있는데  스트레칭은  하는지. 쌓인 빨래와 설거지, 4일째 만들기를 다짐만 하고 있는 해독주스 재료들이 한숨을 쉬는  같다. 나는 이제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프로도처럼 씻고, 판타지  나물이 아닌 실물 해독주스를 만들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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