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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May 13. 2022

꿈은 없고 그냥 놀고 싶은 줄 알았는데

2년 전, 아이들이 광고 찍는 현장을 취재하러 어느 스튜디오에 갔다. 예정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촬영 현장이 준비되지 않아 아이들이 있는 대기실 한편에 앉았다. 창 틈새로 볕이 들어오는 스튜디오는 꽤나 근사했지만 퇴근시간이 늦어진다는 생각에 나른한 공기가 되려 갑갑하게 느껴졌다.


지루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떤 아이가 옆을 계속 맴돌더니 내쪽으로 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대뜸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에게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이름을 말해줬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아예 내 옆에 앉았다. 예의상 나도 아이의 나이와 이름을 물었다. 9살이라고 했다. 아이는 내 나이도 묻더니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다.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졸지에 인터뷰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디 사는지, 나이가 몇 살인지 등등 호구조사 끝에 아이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꿈?......"

술술 나오던 말이 탁 막혔다. 꿈이라니. 당황스러웠다. 최근 10여 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어요'라는 자조적인 직장인의 농담으로 아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적당히 둘러대거나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음.. 비밀이에요."

비겁한 대답이었지만 최선이었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듣는 게 이런 기분이라니. 앞으로는 어떤 아이에게든 꿈이 뭐냐고 묻지 않으리라.


비밀이라는 나의 대답에 아이는 잠깐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선생님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비밀 찬스는 이미 써버렸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 같아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잠깐이었는데도 '꿈'이라는 단어도, 관련된 기억도 쑥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무심코 툭, 말했다.

"아,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면 지금은요? 꿈을 이뤘어요?"

"어...... 그렇네요."


댕 하고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자기소개서에 써야 했던 입사 후 포부라든가, 10년 후 나의 모습은 진짜 꿈 따위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꿈이라니. 그건 무척이나 진부하고, 유치한, 어린, 환상을 동반한 단어가 된 지 오래였다. 수능 점수로 대학과 학과를 정하고, 스펙을 가늠해 취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남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들여다봐야 했다. 먹고사는 것, 커리어, 연봉, 내 집 마련을 꿈이라고 말하는 나이에 꿈은 좀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렸을 때 꿈꾸던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니! 빛바랜 보물상자를 찾은 것처럼 먼 기억에서부터 기쁨이 차올랐다.


"아까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꿈도 똑같아요. 나중에도 글을 쓰고 싶어요."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아이에게 속삭이듯이 말해줬다. 어쩌다 보니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돌아 돌아 끝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대학에서 글과 관련된 학과를 전공하지도, 아니 글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강의를 들은 적도 없었다. 늘 노력하고 발버둥 쳐야만 얻는 게 당연한 삶에서 글을 쓰는 지금의 일이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몇 가지 물어볼게요. 잘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말해줘도 돼요. 녹음할 건데요, 다른 데는 쓰지 않고 제가 글 쓰는 데만 쓸 거예요. 괜찮아요?”

순간적으로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녹음기를 켰다. 마음 문을 활짝 열어둔 우호적인 인터뷰이가 내 앞에 있었다. 써야 하는 사람의 책임이 아닌 쓰는 사람의 기대가 앞선 건 오랜만이었다. 지루하던 공기는 금세 아늑한 분위기로 색을 바꿨다.


업에 대한 고민이 들 때마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9살 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업무,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 세련되지 않은 커리어 속에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뭔지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내내 즐거웠고, 지금도 즐거운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나가는 것. 물론 쓰는 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돈을 벌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써야 하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쓰는 사람은 언제든지 될 수 있으니까.


왠지 오늘은 밀린 글도 기쁘게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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