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가며 세상을 오렌지 빛으로 덮었다. 부서지는 파도와 금이 간 콘크리트 덩어리마저 노랗게 물이 들었다. 언젠가 체크아웃하던 손님이 이렇게 예쁜 바다와 노을을 매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지겨워진다고 대답했는데, 다시 만나게 된다면 '죄송해요. 제가 틀렸네요.'라고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괌으로 간 건 순전히 도피였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전공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보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대학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조금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한 호텔경영학은 호텔에 취업하는 것 말고는 써먹을 데가 없었다. 호텔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2학년 때 실습을 나간 이후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전공을 바꿀 용기도, 자퇴할 강단도 없어서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다.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지긋지긋한 대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해방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살면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대학생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를 떼고 혼자서 삶을 꾸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망망대해에 떠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천만 원 가까이 쌓인 학자금 대출도 불안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
습관적으로 학교의 취업 지원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다 괌의 작은 호텔에서 1년간 근무할 인턴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공고를 보자마자 이곳에서라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절대 안 갈거라 했었지만 왠지 한국 호텔과는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들었다. 모집 공고와 함께 게시된 호텔 홍보 사진 속에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모델이 행복해 죽겠다는 듯 웃고 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부터 호텔 산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과장해서 지원서를 작성했다. 호텔 실습 경험이 나름 도움이 되었다. 월급이 최저 시급도 안 됐던 탓에 지원자가 적어서였을까, 생각보다 쉽게 인턴십에 합격했다. 망설임 없이 짐을 꾸렸다. 인턴십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 값싼 노동 착취에 불과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었다. 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괌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가 일했던 호텔은 해변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호텔과 리조트 행렬에서 가장 구석에 있었다. 오래된 호텔이지만 모든 객실에서 바다가 보여 인기가 좋았다. 손님이 오면 객실을 체크인, 체크아웃하고 요구사항을 처리해주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었다. 매일 다른 손님들이 같은 요청, 같은 문의를 했다. 나는 영혼 없이 친절한 말투로 전날에도 그 전날에도 했던 말을 기계처럼 뱉어냈다. 괌에서의 삶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도피가 일상이 되니 다시금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지겨워했다. 이 작은 섬이 너무나 지겨워 견딜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손님들도, 어디를 가나 보이는 푸른 바다도, 습한 바람도,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도, 365일 뜨거운 날씨마저 싫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도피는 실패였다. 괌이 아닌 다른 어디에 갔어도 실패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 래리는 괌에서 제일 멋진 절벽에 데려다주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꼭 가봐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길래 못 이기는 척 따라왔더니 도착한 곳은 어느 외진 주택가 뒤 풀숲이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여기가 맞냐고 묻자 래리는 일단 와보라며 익숙한 듯 풀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차하면 필요할 수도 있으니 작은 돌을 하나 주워 들었다. 제멋대로 자란 풀을 헤치며 따라가 보니 사람들이 오가느라 다져진 흙 길이 나왔다. 그래도 누군가는 종종 오고 가는 곳인 듯하여 조금 마음이 놓였다. 주웠던 돌은 멀리 던져 버렸다.
길은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숨이 막 가빠지려 할 때 정상에 다다랐다. 대자연의 웅장한 해안 절벽 같은 건 아니고,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간 회색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곳인지는 래리도 모른다고 했다. 어린 친구들의 아지트 정도로 사용되는지 곳곳에 락카로 칠한 낙서가 많았다. 그래도 필리핀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찰박거리는 파도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콘크리트 절벽에 걸터앉아서 지는 해가 내뿜는 노랗고 붉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살짝 휘어진 걸 보니 역시 지구는 둥글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기억은 미화되고 돌이켜 보면 늘 좋은 것만 남아서 나는 언제나 지나온 날을 그리워했다. 괌에서 제일 멋진 절벽 아래 오렌지 빛으로 윤슬이 반짝이던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이 지겨운 섬을 매일 그리워할 터였다.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던 순간도, 모래사장에 앉아 밤을 지새우던 순간도, 텅 빈 영화관에서 혼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화를 보던 순간도, 동료들과 시시한 농담을 나누던 순간도, 필리핀 매니저와 싸우고 무단결근하던 순간도, 진상 손님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던 순간까지도. 어제 같던 오늘에도 자그마한 새로움과 즐거움이 있었다. 순간 속에 있을 때는 알아보지 못하고 꼭 지나고 나서야 애틋해했다. 도피한 일상에서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도피하려던 찰나에 알았다. 한참이 지나 돌이켜 보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덜 지겨웠을까, 조금은 더 행복했을까. 아, 이번 도피는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