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어님, 안녕하세요.”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종종 보던 거래처 사장님이었다. “요즘 계란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라며 살갑게 말을 건네는 그에게 별안간 짜증이 났다. 그놈의 계란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시달리다 겨우 숨 좀 돌리러 나왔는데, 열 받게 하려고 작정한 건가 싶었다. 대충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는데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시발, 내가 계란으로 보이나?”라고 내뱉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오래도록 멈춰 서있었다.
그들은 나를 바이어님이라고 불렀다. 족히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바이어님, 바이어님 하며 허리를 굽힐 때면 조금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식당이나 식품제조 공장에서 필요한 식자재를 싸게 많이 사는 것이 바이어의 일이지만, 실제로는 거래해달라고 찾아오는 업체 중에 입맛대로 다루기 좋은 곳을 골라 가격을 후려치는 게 전부였다. 동정심이나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아야 훌륭한 바이어가 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새벽 배송 때 발생한 클레임을 확인했다. 그날은 유독 계란 관련 클레임이 많았다. 거래하던 양계 농장에 AI 조류 독감이 퍼져서 배송을 못했다고 했다. 계란 담당 바이어 미영 선배에게 불만 전화가 이어졌다. 미영 선배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곧바로 거래업체에 전화해 방금 들은 불만 사항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번엔 수화기 너머로 죄송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영 선배는 급하게 다른 업체를 찾아 계란을 매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류 독감은 전국으로 퍼져 수백만 마리의 닭이 폐사했고 계란은 더욱 귀해졌다. 새로 거래한 업체에서도, 어디에서도 계란을 구할 수 없었다. 모든 사업장에서 계란 바이어를 찾는데, 미영 선배는 자꾸만 자리를 비웠다.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난 미영 선배는 계란이 없는 게 본인 잘못도 아닌데 사람들이 자기만 탓하는 게 억울하다며 꺼이꺼이 울었다. 팀장은 나에게 지금 하는 일 잠시 멈추고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미영 선배 일을 도우라 했다.
계란에 관한 모든 문의가 나에게 들어왔다. 하루 종일 전화가 울려대고 계란 좀 구할 수 없냐는 메시지와 메일로 노트북이 뜨거웠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나만 보면 계란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수소문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로 납품하는 베이커리 공장에서는 계란 없어서 물량 못 맞추면 책임질 거냐며 이래서 여자들이랑 일을 못하겠다고 욕설을 뱉었다. ‘여자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닭을 내가 죽였냐? 애초에 난 계란 바이어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라고 들이받는 상상을 했다. 현실 속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무도 몰래 책상을 내리 쳤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회사에서 꺼내지 못한 분노는 가장 가깝고 편한 사람에게 쏟아버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나를 맞아주는 엄마에게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말라고 쏘아붙이며 방문을 닫아버렸다.
조류 독감 파동이 진정되고, 계란 수급도 나아졌다. 팀장이 해외소싱 팀장에게 미국산 냉동 전란액, 난황액 수입을 부탁한 덕분에 베이커리 공장 납품도 무리 없이 마쳤다. 미영 선배는 이제야 한숨 놓겠다며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미영 선배가 꼴 보기 싫었다. 미영 선배는 우는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미영 선배는 평소에 가장 활발히 거래하던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계란 하나 못 구해 와서 일을 이렇게 만드냐, 앞으로 거래 끊기고 싶냐며 언성을 높였다. 한바탕 소리를 친 미영 선배는 만족한 듯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미영 선배처럼 훌륭한 바이어가 되기 전에 그만둬야겠다 다짐했다.
팀장은 입버릇처럼 바이어는 갑이라며,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라 했었다. 지금처럼 하면 잘 나가는 바이어가 될 수 있을 텐데, 이대로 그만두기엔 아쉽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어디서나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니 곧 있으면 정말로 훌륭한 바이어가 될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갑질하고, 다른 갑에게 당하면 다시 또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삶에 적응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멈췄다. 팀장은 혹시 담당 품목인 건어물이 별 볼 일 없어 보여서 그런 거라면 지금 공석인 한우 바이어 할 생각은 없냐 물었다. 아, 팀장님. 그 역시 훌륭한 바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