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말을 잃어버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독일 공기 중에 머물다가 아무에게도 가 닫지 않는다. 아, 가끔 남편에게 도착하는 경우는 있다. 가끔.
그녀는 아이들도 있다. 아들은 아직 어려서 제대로 된 단어를 주고받기 어렵지만, 독일에서 나고 자란 딸은 그녀와 곧잘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일방적이다. 그녀는, 그녀의 엄마가 그랬듯이, 일방적인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랬구나.’, ‘그런 기분이었구나.’, ‘네 잘못이 아니야.‘를 연습한다. 그녀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은 분주히 움직이며 저런 말을 하는 걸 딸은 종종 인지한다.
집 밖에서 그녀는 거의 독일어로만 이야기한다.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사는 곳에는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으니까. 그래서 의도적으로 한국말을 내뱉은 적도 있었지만, 요새는 그마저 듣기 어렵다.
그녀가 사용하는 독일어는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회사에서 쓰는 업무용 독일어와, 아이들 유치원 선생님이나 학부모들과 이야기하는 수다용 독일어다. 수다용 독일어를 쓸 때, 그녀는 종종 진심으로 웃는다. 말이 빨라지고, 손동작도 곁들인다. 억울함도 적당히 표현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하기도 한다. 상대방 말을 끊어가면서까지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집에 와서 후회한다. 그녀의 독일어 말투는 ‘대외용 엄마’의 말투다. 상대방에게 짜증 내지 않고, 모르는 건 적당히 넘어가고, 아이 교육에 있어서는 끈질기게 물어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땐, 그냥 입을 닫고 있는 편이다.
회사에서 쓰는 그녀의 업무용 독일어는 정말 듣기 어렵다. 그녀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입에서 나오는 단어의 개수도 확연히 차이 나고, 문장의 퀄리티도 들쑥날쑥이다. 그녀도 이걸 알기에 더 말을 아낀다. 다행히 그녀는 이미지와 도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기에,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적당히 굴러간다. 그러다 전화라도 해야 할 때가 오면, 마치 관객이 있는 악어 우리에 아무런 기술 없이 던져진 느낌이다. 단어와 문법이 사정없이 섞여 엉뚱한 말을 하기 일쑤다.
독일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돌아와 집 문을 여는 순간 그녀를 반기는 건 ‘환영합니다. 여기부터는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주로 아이들과 놀고, 아이들에게 지시하고, 말없이 집안일을 한다. 입을 떼는 데 드는 에너지를 아껴서 집을 정돈하는 데 사용하려는 사람 같다. 그녀는 소리 에너지를 모아서 적는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