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줌마 생존기
그녀에게는 모든 게 당연했다.
자신의 남편은 가장 잘나야 했고, 본인이 낳은 아들은 당연히 최고여야했고, 자기가 선택한 모든 것, 혹은 에너지와 역량을 집중한 모든 것이 최고의 아웃풋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인정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
언뜻보면 평범한 외모의, 그저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을 둔 40대 아줌마였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이를 그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는 사실 '조금만' 손보면 무척 아름다워질 외모지만, 자신은 젊었을 때 외모보다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마음의 깨달음을 얻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주변에서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볼수록 매력적이고 피부도 좋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교회에서 같은 집사님들도, 병원 직원들도, 백화점의 매장 점원들도 자신에게 어쩌면 사모님은 갈수록 밝아지시고 인상이 좋냐는 말들을 한다.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직원 수가 가장 많은 그 대기업의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소개는 시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그 회사에서 얼마나 유망하고, 좋은 직책이며, 배경이 훨씬 뛰어난 사람보다 더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자랑했다. 그녀의 남편이 다니는 곳은, 사실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하는 계열사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면 회장이 특별히 아끼고 최고의 엘리트만 선발해서 파견하는 엄청난 핵심 계열사임에 분명하다. 회사 직원 혜택으로 제공되는 리조트를 다녀와서 그녀는 그 리조트에서 '직원에게만' 주어지는 방은 무엇이 다른지, 이불은 얼마나 부드러운 것을 쓰는지, 자신의 남편이 특별한 회사에 다녀서 '역시' 프론트 직원이 대우하는 것도 남다르다며, 조식의 계란 프라이 익힘까지 칭찬하고야 만다.
하나뿐인 아들은 어떠한가. 그 아들은 나에게 보여준 휴대폰 사진으로는 그저 통통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아들은 이 세상의 아이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얼마나 예의바르고 신앙심이 깊은지, 양치질을 태어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지, 내일 새벽기도를 다녀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거라며 숙제를 일찌감치 끝내놓고 잠을 자는지까지 감칠나게 설명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있다보면, 남의 자식 이야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엄마들에게도 기어코 부럽다는 말을 들어야 흡족한 듯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자랑 끝에는 '그녀' 자신에 대한 자랑이었다. 자신은 아주 잘나가는 기업에서 특히 윗사람에게 요즘 사람같지 않다는 칭찬을 받으며 고속과 이직을 계속하던 직장인이었지만, 자신이 이룬 가족이 소중하고 그만큼 헌신하고 싶어서 퇴사를 하고 육아에 전념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흔한 스토리. 이후 아이를 유기농 재료에 건강식만 먹이고 키우며, 약하게 태어났으나 지금 운동선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튼튼한 아들로 키워냈다는 것. 자신의 철저한 자녀교육으로 아들은 어디가서나 '엄마가 누구시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러나 궁극적인 자랑의 절정은 그녀의 부동산 재테크였다. 부동산은 그녀의 신앙의 증명이자, 종교의 이유였다. 그녀는 하나님께 늘 좋은 집을 구할 '지혜'를 달라며 기도했고, 그 '응답'으로 재건축 아파트 구매 타이밍을 잡았다고 한다. 당시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는 많았지만, 역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신 덕분에, 그녀의 아파트는 인근의 재건축 조합 중에서 가장 단시일안에 가장 좋은 조건과 구조로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자기의 꼼꼼한 재테크 공부와 실행 능력으로 비록 자신이 전업 주부이기는 하지만, 직장인과 비교할 수 없는 이익을 실현했다며, 자신을 긍휼히 여겼다.
이에 꼭 덧붙이는 것은, 부동산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 자신처럼 열심히 공부하거나 실행하지 않아서 아직도 내집 마련을 하지 못하거나, 서울에서도 하급지는 중급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가장한 한심스러운 잔소리였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 중에서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같은 최고의 '혜안'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국 그런 동네에서 살며 불만이나 열등감을 갖고 살아갈거라며, 자기 아들이 그런 동네 출신의 여자애랑 '행여라도' 만날까봐 걱정했다. 사람은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는 같은 수준과 만나야 한다면서 어쩌다 교회 모임이나 봉사단체에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 특히 대대로 부자인 집이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집안의 사모님들과 대화라도 잠시 하면, 대단한 영광스러워하고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며 자신이 이런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게 현실인지 감격스러워했다. 그 사람들이 걸친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며, 남과 이야기하며 이것은 내가 어느 봉사모임에서 어떤 집안의 수수해보이던 사모님이 눈에 띄지 않게 들고 다니시던 그 가방의 브랜다라며, 역시 그런 사람들은 다르다며, 자신의 눈썰미와 센스를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로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이 어떤 집안 사모님과 알고 있으며, 그 분도 내가 봉사활동에서 헌 옷을 정리하는 센스에 감탄했다며, 자신의 인맥 과시의 도구로 활용함과 동시에 그런 특별한 분에게 인정을 받는 정도의 '나'를 강조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런 상급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와 동경과 동시에, 불가촉 하급지에 대한 무시와 모멸에도 가닿았다. 그녀와 상급의 벽은 바자회와 교회를 통해 얼마든지 넘을 수 있는 살랑살랑한 가벽이었고, 그녀와 하급지의 벽은 절대로 뛰어넘지 못하고, 감히 뛰어넘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하는 한쪽은 지난치게 더럽고 한쪽은 티없이 깨끗한 그런 벽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올라타고 온 그 벽이기도 했다. 그 벽의 사다리를 그녀는 스스로 밀어버렸다.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그녀의 주위는 점점 메말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