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의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 - 그런데 판타지를 곁들인
태연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아이돌이자, 아이돌 그 이상의 스펙트럼을 선보이는 단어 그대로의 '보컬리스트'이다. 아이돌이면서 아이돌이지 않은 것, 그것은 한계 없이 넓은 장르의 음악을 보여주는 현재의 태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특징이다.
기복 없는 가창력과 화려한 비주얼부터 시작하여, SM이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자본을 업은 앨범 전반의 디테일이 하나하나 공개될수록 2년 반 만에 나오는 태연의 정규 앨범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다각도의 자극을 원하는 요즘의 대중들을 공략하기에는 오로지 음악으로만 승부를 보는 것보다는 SM만이 할 수 있는 여러 볼거리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고, 태연은 음악과 더불어 이런 볼거리의 요소를 가장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위의 사진들은 이번 앨범 프로모션 과정에서 공개된 티저의 극히 일부이다. 얼마나 많은 비주얼 요소들이 사용되었는지 체감되는 양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이번 앨범만큼 재미있는 앨범도 없을 것이다. 태연은 아이돌과 아이돌이 아닌 것, 양쪽에서 장점만 취할 수 있는 가수이기 때문에 이런 눈에 띄는 콘셉트는 비교적 데뷔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태연이라는 아티스트가 앨범마다 차별점을 두고 신선함을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비주얼과 판타지 영화 같은 설정들은 모두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이번 앨범의 콘셉트가 음악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뮤직비디오나 걸그룹 에스파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화면과 설정 같은 이런저런 비주얼 요소들이 태연이라는 아티스트와 결합하여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그런 모든 비주얼 요소들이 이번 앨범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는 알기 어렵다.
모든 트랙에서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기사 보도와 인터뷰 자료에 기반한다면, 연애 과정을 다루는 한 편의 영화나 스토리를 구축한 후 각 수록곡에 맞는 장면과 분위기를 담은 티저를 제작하는 형식도 재미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번 트랙 Siren 같은 판타지스러운 수록곡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예지몽처럼 다루면 충분히 녹여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선공개곡 'Can't Control Myself'의 뮤직비디오에서 태연의 연기력이 입증됐는데, 정말 잘 해냈을 것만 같다.
2019년 10월에 나왔던 태연의 정규 2집 Purpose에서는 프로모션 과정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었다. 흑백의 모노톤 비주얼과 '불티'라는 제목이 가졌던 파급력, 그리고 정규 2집 전반에 녹아 있던 일관된 메시지 등을 함께 고려했을 때 이 방식은 꽤 효과적이었다.
이번 앨범의 프로모션에도 전시회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선공개곡 'Can't Control Myself'에서 보여준 비주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된 티저 영상과 이미지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정규 2집 때처럼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지는 않다 보니 이번에는 전시회가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앨범의 영역을 확장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이번 앨범은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 꽉꽉 채운 음악들이 가득한데,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대중음악에서 가장 만만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기에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차별점을 찾자면 '나'의 관점에서 풀어낸 사랑 이야기라는 점인 듯하다. 상대의 행동을 통해 내가 느꼈던 감정, 상대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 등 화자에게 초점을 맞춘 사랑 이야기는 이제껏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를 바삐 쌓아왔던 태연을 만나서 조금 더 설득력을 가진다.
타이틀곡 'INVU'는 직접적인 가사와 몽환적인 후렴의 플룻 멜로디가 합쳐져 만들어지는 오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이고, 눈에 띄는 퍼포먼스와 포인트 안무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강렬한 음악에 덧입혀지는 안무 등은, 퍼포먼스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여타 솔로 가수들의 잔상을 언뜻언뜻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태연이 이전에 시도한 적이 없는 느낌의 퍼포먼스라는 점에서는 또 색다른 볼거리가 되어준다. 최근 Weekend 활동이나 SM 합작 걸그룹이었던 GOT 갓더비트 활동의 음악방송을 통해 '소녀시대'의 노련함을 다시 한번 보여줬던 태연이기에, 이왕 타이틀곡에 안무를 넣은 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음악방송 활동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운드로 채워진 음악들이 가득한데, 정규 2집 Purpose가 적갈색과 검은색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면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채도 낮은 청회색으로 칠한 그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랑의 행복하고 반듯한 장면이나 기쁨보단 일그러지는 끝, 상처, 슬픔, 질투(envy)의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정작 앨범은 발렌타인데이에 발매됐다는 점이 꽤 역설적이다.
여담이지만, 이번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Ending Credits'이 내게는 이전 태연 앨범의 수록곡들을 떠올리게 했다. 정규 1집 리패키지 앨범의 수록곡 'Curtain Call', 정규 2집 리패키지 앨범에 수록됐던 '월식 (My Tragedy)'와 대략적인 소재가 연결된다고 느껴진다. 함께 들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Curtain Call'은 제목처럼 공연의 막이 내리는 장면을 이별의 순간에 빗댄 노래이고, '월식 (My Tragedy)'는 '비극'이라는 부제와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연극이 끝나면 나는 없을 테니' 같은 가사를 통해 연극이라는 소재의 특징을 가져오는 노래이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Ending Credits'는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담하게 이별을 대하는 자세와 결부시켰다.
매 앨범마다 달라지는 타이틀곡의 스타일이나 장르 등을 보았을 때 나는 예전부터 태연과 태연의 음악을 영상 장르에 비유하자면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드라마 같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현실적인 것들과 연관 짓지 않고, 앨범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하나의 극을 만드는 것 같다고 느꼈고 그 방식이 굉장히 극적인 효과를 준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태연의 앨범에 이렇게 '공연', '연극', '영화'라는 주제를 앞세운 수록곡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태연이라는 보컬이 보여주는 너른 감정의 낙폭과 다양한 전제의 이야기를 꾸준히 좋아해 왔기 때문에 이번 앨범도 잘 들을 수 있겠다. 이 앨범을 와인으로 비유하자면 향긋한 상그리아. 여타 주류보다 가볍지만, 취하긴 한다.
태연 정규 앨범 [INVU]
1. INVU
2. 그런 밤 (Some Nights)
3. Can't Control Myself (선공개)
4. Set Myself On Fire
5. 어른아이 (Toddler)
6. Siren
7. Cold As Hell
8. Timeless
9. 품 (Heart)
10. No Love Again
11. You Better Not
12. Weekend
13. Ending Credits
*굵은 글씨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곡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