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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tle Creatures May 28. 2020

사우디에서 코로나 겪기

This too shall pass away

사우디 코로나 상황


이제까지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불편하고 불안한 경험이다.


우리나라에서 한창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움을 겪을 때 사우디는 나름 대처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20.3.3 사우디에서 최초 확진자가 발생하고 나서, 사우디 정부는 휴교령, 출입국 금지령, 쇼핑몰과 상가 폐쇄, 재택근무 명령, 24시간 통행금지 명령 등의 조치들을 3월 내내 신속하게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5월 말 현재 결과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선제적이고 강력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전혀 무의미하다.

5월 초 일일 확진자 2천 명을 넘어서더니 5월 말에는 3천 명 가까이 발생하였고 누계 확진자는 7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코로나 확산원인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사우디에서 3D업종에 종사하는 천만 명에 이르는 저소득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이 지목되고 있다.

그들은 통상 고용주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생활하며, 한 방에서 여러 명이 거주하는 열악한 숙소 환경은 전염병 확산 예방을 위한 조치들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많은 불법체류자들은 추방을 두려워하여 증상이 있더라도 숨기고 나서지 않고 있다.

[슬럼가 방역활동]

또한, 사우디는 가족생활과 종교생활이 워낙 중요한 부분이어서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안전수칙이 지켜지기 쉽지 않다. 확산 방지를 위해 모스크에서 모여 예배 보기를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옥상에 모여 기도하는, 출처와 시기가 불분명한 사진이 떠돌고 있다. 

[출처와 시기가 불분명한 옥상 기도 사진]

사우디는 메르스 발생국으로 전염병에 대해 잘 갖추어진 방역체계를 기대하였는데 이 또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실제로, 회사 직원의 동생이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그 직원은 동생이 코로나 확진을 알기 전에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우디 보건당국에서는 회사 직원에 대해서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자가격리만 지시하고 감염 검사는 해주지 않고 있다.


성급한 예방조치 완화

다행하게도 최근 며칠간 확진자가 2 천명선으로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확진자 추이를 보겠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5월 말부터 통행금지 완화, 직장 복귀, 쇼핑몰과 레스토랑을 다시 열겠다는 성급해 보이는 완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동안의 답답함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라도 발표된 완화 조치가 반갑기는 하지만, 한편 더 큰 불안감으로 다가오는 건 나만의 민감한 과잉반응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초기에 나는 만약 코로나에 감염이 되면 한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사우디에서 코로나에 감염된다면 누구에게서도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우디의 의료시스템에 온전히 맡겨야만 한다.

불안하다.


사우디에서 코로나 겪기


사재기

코로나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우선 걱정은 식료품 부족사태였다. 남의 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전혀 처음 겪는 상황이어서, 부끄럽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고 방에 물과 식료품을 비축해 두었는데, 사면 살수록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사우디의 사회적 시스템이 잘 작동되어 식료품 부족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초기에 마스크, 손 세정제, 계란, 포도주스 등 일부 품목의 공급 부족이 있었으나, 24시간 통행금지에도 인근 약국과 마트에서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주어 큰 불편함은 없었다.


이제는 신뢰가 생겨 비축해 두었던 식료품을 열심히 소비 중이다.


감금 생활

24시간 통행금지로 가족들은 거의 3개월째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J도 3월 초부터 시작휴교령에 따라 감금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다 5월 중순에 시작되어 8월 말에 끝나는 3개월 반의 기나긴 여름방학이 전혀 즐겁지 않고 어떻게 보낼지 부모도 아이도 답이 없는 걱정만 하고 있다.

나 역시 재택근무와 단축 근무를 반복하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답답했는데, 5월 말부터 가능해진 출근이 나 자신도 믿기 어렵지만 설렌다.


사우디는 할 것도 갈 곳도 없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코로나 사태가 이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불만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먹고 살기

졸지에 삼식이 둘을 거두어야 하는 RJ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짐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휴교령으로 J가 하루 종일 집에 있기 시작하자, RJ는 J의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각 종 영양소가 계산된 성의가 듬뿍 담긴 식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나자, 시간이 갈수록 음식에 잔뜩 담겨있던 성의가 손아귀 모래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기간이 길어짐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남의 아들까지 삼시세끼 해 먹여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내가 들리게 여기저기 하고 다닌다.

난 안 들리는 척 지혜롭게 버티고 있다.


나는 RJ의 스트레스 해소와 가족들의 체력 보충을 위해 바비큐를 준비했다.

사우디의 한 여름에 야외 바비큐는 생각하기 힘든 옵션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리고 더위가 한풀 꺾여가는 6시경 그늘에 앉아 있으면 덥기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리야드에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양갈비를 취급하는 고급 정육점이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어, 미국산 소고기 꽃등심(6만원/KG)과 양갈비(3만원/KG)를 1회용 바비큐 불판(개당 5천원)에 올려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도록 굽고, 있는 반찬과 야채를 곁들이니 생각보다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던 옥상은 황량하지만 그래도 외부에 나왔다는 해방감으로 가족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휴가 날려먹기

사우디 공휴일은 라마단이 끝나면 시작되는 EID Al-Fitr와 EID Al-Adha가 각 각 4일간 그리고 9월에 국경일 하루를 더하여 연간 총 9일이 있다.


사우디에서 독신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번의 EID 휴일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가, 휴가/연차를 붙여 보통 2주~3주 정도 한국으로 휴가 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한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일정이 꼬여버린 일부 독신 직원은 벌써 1년 가까이 가족을 못 보면서 생활하고 있다.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재택근무와 통금으로 주어지는 추가 여유시간은 독신자를 심적으로 더 괴롭게 하기도 한다.


가족 동반자들은 많은 경우 유럽 여행에 나선다. 상대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항공료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뜩 기대했던 이번 EID 휴일 동안의 스페인 렌터카 여행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 에어비앤비, 렌터카, 유로 자전거나라 등은 모두 환불을 해주었다. 하지만 취소불가 조건의 항공 예약은 18개월간 유효한 크레딧으로 보상받았는데,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 사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시간죽이기

가족들은 아침에 일찍 깨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RJ와 J는 아침 10시나 되어야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서, 아점을 먹고는 각자 하고 싶은 개인생활을 한다.


우려했던 J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다.

감금 기간이 길어질수록 J가 게임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J는 물론 유튜브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래도 가족과 대화에 적극 동참하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까지 하면서 기특하게 가끔 공부도 한다. 게다가 우리 집 귀여움 담당으로서의 역할도 잊지 않고 수행해주고 있다.


우리는 해 질 무렵부터 서로 아는 척 하기 시작한다.

통행금지가 되고나서부터 시작한 "컴파운드 산책"은 우리나라에서 먹고 싶은 음식, 유럽 여행 계획 등의 공허하고 사소한 이야기로 갇혀 지낸 답답함을 풀어주고 또 운동까지 되어, 하루 중에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루미큐브라는 보드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 혼자서 아이들의 패를 보고 놓아주며 북 치고 장구치고 했었는데, 이때는 게임이라기보다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는 최선을 다해 게임에 집중해도 J를 이기기가 어렵다. 전력을 다하니 게임이 재미있고 즐기게 된다. 어제는 두 판 연속 꼴찌를 했더니, 어릴 적 그 존경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아빠쯤이야 라는 건방짐이 엿보인다.


손목맞기 고스톱으로 마무리까지 하고 11시경에 각자 침실로 헤어진다.

헤어지면서 아들이 한마디 한다. "또 자야하나?"



대사관과 한인회의 노력으로 벌써 2번의 특별 전세기가 사우디에서 우리나라로 출발하였다.

발이 묶여 있던 교민/주재원들과 방학을 맞이한 가족들은 한국 도착 후 2주간의 자가격리에도 불구하고 귀국길에 나섰다.

우리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만약 귀국했다가 사우디로 복귀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경우의 불이익 때문에 결국 일단 남아있기로 했다.


하지만 3개월 반의 기나긴 여름방학을 온전히 사우디에만 있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7월에 하늘길이 열린다는 떠도는 소문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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